근년에 중국은 빠르게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 거의 모든 면에서 중국은 미국 다음으로 크고 중요한 나라다.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미국을 제치고 가장 강대한 나라가 되리라는 전망도 자주 나온다. 중국의 그런 변신을 떠받친 것은 물론 빠른 경제성장이다. 중국 경제는 지난 30년 동안 9퍼센트가 넘는 연간성장률을 누렸다. 그래서 개인 소득은 거의 7배 늘었고, 4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났다. 여러 가지 부정적 효과들이 따랐지만, 이것은 역사상 가장 큰 경제적 성취다.
중국의 그런 경제발전은, 다른 모든 성공적 경제성장의 사례들과 마찬가지로, 경제를 자유롭게 만든 데서 비롯했다. 중국은 사회주의 체제 아래서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렸다. 모든 농토를 집단농장들로 편성한 일은 특히 큰 재앙을 불러서, 수천만 명이 굶어 죽었다. 마침내 1978년에 그런 사회주의 경제체제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 pp.11~12쪽
앞으로 중국은 제국주의를 더욱 공격적으로 추구할 것이다. 중국의 공산당 정권이 민족주의로 자신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강대국의 민족주의는 궁극적으로 제국주의의 모습을 하게 마련이다. 〔……〕 게다가 역사적 정황은 중국에서 낭만적 애국심이 유난히 번창하도록 만든다. 민족주의적 열정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역사를 의식적으로 되살아보려는 결심을 낳는다. 그래서 오래전에 자신들의 선조가 품었다고 여겨지는 열망을 자신들도 함께 품으려 애쓰며 그 열망을 실제로 이룰 ‘역사적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고대부터 줄곧 아시아의 문화적?정치적 중심이었다가 근대에 서양 열강과 일본의 침략을 받은 역사 때문에, 중국 사람들은 찬란했던 역사를 되살아보고 싶은 열망이 유난히 크다. 이런 낭만적 애국심은 필연적으로 제국주의적 특질을 지니게 되어 둘레의 나라들과 부딪치게 된다. 〔……〕
앞으로 공산당 정권이 장악한 중국 정부는, 바라든 바라지 않든,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제국주의적 정책을 따를 것이다. 정권의 정당성을 민족주의에서 찾아야 한다는 정치적 필요는 대중의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정책을 필연적으로 만들 테고, 그렇게 북돋우어진 대중의 민족주의적 열정은 중국 정부가 공격적 제국주의를 추구하도록 강요할 것이다. --- pp.48~52
중국과 긴 국경을 공유하므로, 한반도는 중국의 공격적 제국주의의 영향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크게 받는다. 역사적으로, 한반도는 중국의 그늘을 벗어난 적이 드물었다. 한(漢)의 침입으로 고조선이 무너진 뒤, 중국의 정치적 영향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던 삼국시대를 빼놓고는, 중국에 조공함으로써 중국과의 관계를 평화적으로 유지해왔다. 중국에 대한 그런 예속은 19세기 말엽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비로소 끝났다. 중국이 다시 강성해지자, 중국은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빠르게 늘렸다. 이미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어서 북한은 실질적으로 중국의 속국이 되었다. 한국도 중국의 자장(磁場) 안에 들었다.
우리 마음을 스산하게 하는 것은 중국 공산당 정권이 집요하게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왔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이 1950년 10월에 압록강 너머로 침입해서 유엔군과 싸워 한반도의 통일을 방해했다는 것은 잘 알려졌다. 그러나 애초에 38선을 넘은 북한군의 주력이 실은 중공군이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 pp. 54~55쪽
핀란드화는 본질적으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의 존재에 적응하는 방식이다. 힘에서 비대칭적이면, 강대국은 ‘지배적 정책policy of dominance’을 고르고 약소국은 ‘묵종적 정책policy of acquiescence’을 고르게 된다.
묵종적 정책을 고른 작은 나라는 큰 나라의 영향력에 세 가지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 하나는 아예 대응하지 않는 것이다. 이 방식은 작은 나라의 역량이 조직화되지 못한 경우에 나온다. 둘째 방식은 정예집단이 큰 나라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자신의 가치체계를 나라 전체에 강요하는 것이다. 이런 ‘강요된 지배imposed domination’의 경우, 흔히 괴뢰 정권이 나온다. 셋째 방식은 정예집단이 큰 나라에 유화적 태도를 보이면서 자신의 핵심적 가치를, 즉 나라의 독립이나 자치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작은 나라의 체체가 큰 나라의 그것과 정체성이 다를 경우, 이런 방식은 자연스럽게 채택된다. 자기 나라가 큰 나라에 의존한다는 세력구조를 인정하고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최선의 방책을 찾는 태도이므로, 이것은 적응적이다. 그래서 ‘적응적 묵종adaptive acquiescence’이라 불린다. 핀란드화는 적응적 묵종의 전형적 모습이다. --- pp.63~64
이처럼 핀란드의 처지와 한국의 처지는 근본적으로 비슷하지만 두드러진 차이들도 있다. 두 나라의 처지가 ?본적으로 비슷하다는 사실은 한국이 중국에 대해 적응적 묵종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두 나라의 처지가 세부적으로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은 한국이 자신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상당히 효과적으로 막아내어 자신의 주권에 대한 침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대항력을 지녔음을 가리킨다. 한국이 스스로 어리석게 대응하지 않는다면, 한국은 핀란드화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 --- pp. 91~92
우리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국의 흥기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이 중요한 물음에 대해 좋은 답을 얻으려면, 우리는 먼저 현실을 정직하게 살피고 우리에게 괴로운 상황을 인정하는 도덕적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으며, 되짚어 나올 길도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의 합리적 대응은 대항력의 함양을 통해 양보를 최소화하는 적응적 묵종이다. 그리고 이미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렇게 대응해왔다.
앞에서 살핀 것처럼, 적응적 묵종의 전략적 개념은 ‘양보’와 ‘대항력’이다. 약소국의 전략은 간단하니, 비대칭적 관계에서 피할 수 없는 양보를 되도록 적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물론 대항력을 한껏 키워야 한다. 양보의 크기와 대항력의 크기는 역비례한다. 우리에게 열린 합리적 선택은 중국에 대해 적응적 묵종을 하되, 협상력을 한껏 키워서, 공동의 이익을 나누는 데서 너무 밀리지 않는 것이다. --- pp.93~94
더 큰 문제는 중국과의 전략적 협력이 미국과의 관계에 미칠 부정적 영향이다. 중국이 초강대국이 되면서, 미국과 중국 사이의 관계는 점점 대립적이 되어간다. 우리가 중국과 전략적 협력을 하게 되면, 우리와 미국 사이의 관계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중국과의 군사적 협력은 한미 동맹에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제기하라 것이다. 아무리 관계가 좋아졌다 하더라도, 한반도에서 한국과 미국의 자유주의 동맹은 북한과 중국의 공산주의 동맹에 맞서고 있다. 한미 동맹은 특히 엄격한 제약들을 우리에게 부과한다. 중국과 전략적으로 협력하는 일이 과연 그런 제약들과 양립할 수 있을까? 미국이 제공하는 군사적 보장이 우리 안보의 핵심임을 생각하면, 이 물음은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다. --- p.122
그 점에서 지금 우리의 도덕적 태도는 걱정스럽다. 중국의 흥기가 자신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을 모두 잘 아는 사회에서 그것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드물다는 사실은 분명히 시사적이다. 핀란드의 경험은 선명히 보여준다, 시민들로 하여금 현실을 외면하고 위선에 매달리도록 해서 도덕적 타락을 부르는 것이 ‘핀란드화’의 본질적 해악임을.
외면과 위선은 당장엔 편리한 선택이다. 그러나 개인이든 사회든 그런 선택에 바탕을 두고 앞날을 설계할 수는 없다. 압도적으로 큰 나라와의 교섭에서 작은 나라가 고를 수 있는 선택의 폭은 아주 좁지만, 도덕적 태도만은 스스로 고를 수 있다. 핀란드 사람들이 줄곧 감추려 애썼던 것이 위선과 자기 검열의 모습을 한 도덕적 타락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내놓는다. 적응적 묵종은 긴 비탈이다. 한 걸음이라도 묵종의 골짜기로 덜 내려가려는 노력은 그래서 긴요하다. 그런 노력이 우리의 도덕적 타락을 막아줄 것이다.
--- p.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