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무의식에는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요? 의식은 우리가 분명히 의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의식은 말 그대로 의식할 수 없는 의식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무의식을 의식할 수 있게 하려면 특정 방법이 필요할 수밖에 없답니다.
브로이어는 그 방법으로 당시 의학계에 풍미하던 최면술을 이용했습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최면 치료에 서툴렀다고 해요. 그래서 프로이트는 환자에게 최면을 걸지 않고, 생각을 집중시켜 떠오르는 대로 말하게 하는 자유연상법을 고안해냈습니다. 그는 환자에게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생각들을 계속해서 말하게 하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저항 등을 추적해 숨겨진 무의식을 파악하고자 한 것입니다. 환자가 떠오르는 단어와 생각들을 스스럼없이 열거해나가다가, 멈칫하거나 회피하고자 하는 부분에서 그는 심리적 저항을 찾아냈지요. 그리고 그것을 추적해나가면서 무의식을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그는 이후 여러 환자들을 접하면서 빠르게 무의식에 대한 체계를 잡아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분석 대상은 여성 히스테리 환자들에 국한되어 있다는 문제가 있었지요. 결국 남성이나 정상인의 무의식 사례가 없다는 단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프로이트는 급기야 정상인이면서 남성인 자기 자신을 스스로 심리 분석하게 됩니다. 그런데 자신이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을 분석한다는 것이 말이 될까요? 그래서 그가 스스로를 분석하는 방법으로 이용한 것이 바로 꿈입니다. 그는 꿈의 분석이 무의식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역설하면서, 그 사례를 담은 『꿈의 해석(Die Traumdeutung)』을 내놓았지요. 이로써 자유연상법과 꿈의 분석, 이 2가지 방법은 무의식으로 가는 분명한 지도를 그려주며, 정신분석학의 가장 기본적인 도구가 되었답니다.
―제1장 심리학, 「프로이트, 무의식을 발견하다」 중에서
이 그림이 완성된 해, 렘브란트는 사랑하는 부인을 잃었고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재혼을 했지만 또다시 사별해야 했지요. 그는 그럴수록 계속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때부터 그가 주로 그린 그림은 종교화와 자화상이었지요. [야경]을 전후로 그의 관심은 인간의 내면을 그리는 것이었고, 자화상은 인간의 내면을 관찰하고 그려내는 데 더없이 좋은 소재였답니다. 젊은 날 그의 자화상이 카라바조풍의 명암과 옷 장식 등의 세부 묘사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면, 말년의 그의 자화상은 자유로워진 붓질과 내면세계에 대한 깊은 성찰, 그리고 고뇌를 감싸는 듯한 따뜻한 인간적 감성으로 물들어 있었답니다.
한편 파리를 중심으로 일었던 루벤스풍의 바로크는 그 유행을 갈아타고 있었는데요, 이름 하여 ‘로코코(Rococo)’입니다. 이 양식은 보통 바로크 양식과 대비되어 설명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바로크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랍니다. 바로크가 생동감과 장중함 등 남성적 분위기가 강조된 것이라면, 로코코는 세련되고 화려한 여성적 분위기가 강조된 것이지요. 우아함과 세련됨을 강조하는 로코코는 루이 14세(Louis Ⅹ Ⅳ)의 죽음 이후, 자신들의 저택에 주로 머물게 된 귀족들의 생활과 취향을 담아내며 세련미를 강조하게 되었지요. 매우 장식적이고 사치스러워 보이는 이 양식은 실내장식이나 가구류의 고급스러운 마무리 장식에 잘 나타나 있는데요, 실용적이지는 않지만 눈길을 끄는 매력을 가지고 있답니다. 로코코 양식이 가진 우아하고 고상한 분위기는 당시 귀족과 사교계뿐만 아니라, 고상한 취미를 가진 서민층에도 확산되어 나갔습니다.
―제2장 서양 미술사, 「렘브란트, 그리고 로코코」 중에서
진나라를 무너뜨린 반란군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자는 ‘항우(項羽)’였지요. 그는 과거 초나라 대장군의 손자인 데다 무예와 전술이 뛰어나 순식간에 세력을 모으고 진나라를 무너뜨리는 주역이 될 수 있었답니다. 하지만 정작 먼저 수도에 도착해 진의 황제에게서 항복을 받아낸 것은 그의 부하 장군인 ‘유방(劉邦)’이었으며, 그는 온정적인 정책을 펴서 민심까지 얻었지요. 반면 항우는 뒤늦게 수도에 입성해 항복한 진의 황제를 죽이고 약탈과 폭정을 일삼았답니다. 유방을 ‘한(漢)나라’ 왕으로 임명하는 등 항우는 진을 토벌한 장수들에게 영토를 나누어주었는데요, 공평한 기준 없이 나누어주어 공신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지요. 결국 유방은 불만을 가진 제후들의 힘을 모아 항우에 대항하는데요, 이때부터 초나라와 한나라의 전면전이 시작된 것이랍니다.
항우는 더 유리한 위치에서 더 뛰어난 전략과 탁월한 전투 능력까지 갖추었지만, 기득권 세력에게만 특권을 부여하는 등 과거의 통치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감정적인 면도 강했지요. 반면 농민 출신인 유방은 처음부터 불리한 위치에서 시작했고 전투에 능하지도 못했지만, 항우의 부하였던 명장인 한신(韓信) 등 사람들을 얻고 활용하는 데 능했습니다. 게다가 농민을 우대하는 정책을 펴서 민심을 사로잡을 수 있었지요. 시간이 지나면서 유방을 지지하는 세력이 늘어났고, 마침내 기원전 202년 해하전투(垓下戰鬪)에서 유방은 항우를 꺾고 중국을 재통일하게 되었답니다.
우리에게 『삼국지(三國志)』만큼이나 잘 알려진 『초한지(楚漢志)』는 이 초나라의 항우와 한나라의 유방이 격돌하는 역사적 사실을 다룬 소설이랍니다.
―제3장 동양사, 「최초의 통일국가 진과 중국의 지배 이념을 제시한 한」 중에서
장자는 이 각자에게 다른 입장이 갖는 상대성을 삶과 죽음의 문제로까지 끌고 나갑니다. 삶이라는 것과 죽음이라는 것도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그는 그 예로써 들에 버려진 해골과 산 사람의 예를 비교합니다. 산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삶은 소중히 지켜야 하는 것이고 죽음은 피해야 할 것처럼 느껴지지요. 하지만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살아 있는 사람이나 들에 내버려진 해골이나, 자연의 변화작용의 한순간들에 불과해 전혀 다를 게 없다는 것이지요. 이에 그는 삶이란 기(氣)가 모여 있는 상태이고, 죽음이란 기가 흩어져 있는 상태일 뿐 큰 차이가 없으며, 그 또한 단지 모여졌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순간들에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장자는 아내가 죽었을 때조차 대야를 두들기며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친구 혜시(惠施)가 이를 보고 그 이유를 묻자, “지금 아내는 천지(天地)라는 커다란 방에 편안히 누워 있는데, 내가 왜 울고불고하느냐”고 말하면서 말이지요.
이렇게 본다면 결국 우리가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사람의 입장, 즉 인간의 인위적인 입장만을 알고 더 큰 자연의 입장을 모르는 것일 뿐이지요. 이렇게 작은 인간의 입장과 거대한 자연의 입장 차이를 멋지게 비유하고 있는 것이 그 유명한 붕새와 매미의 이야기입니다.
―제4장 동양과 한국의 철학, 「언어를 뛰어넘어 진정한 나를 찾는다, 장자」 중에서
반대로 노예의 도덕은 주인의 도덕을 시기하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결여된 도덕입니다. 이 힘없는 약자들의 도덕은 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동정, 박애, 자비와 같은 덕목을 선(善)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진실은 용감하게 행동할 용기가 없는 두려움에 불과한 것이라고 니체는 말합니다.
이제 그는 비겁자의 도덕이요, 노예의 도덕인 기독교의 도덕을 부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현재 유럽 사회에서 통용되는 선악의 구별은 거짓이며, 인간성을 특징짓는 것이 될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 시점에서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유명한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신의 죽음만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신을 지탱하던 선이, 그 위에 세워진 서구 유럽의 모든 가치가, 근대를 지탱하던 인간 이성에 대한 확신이 모두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근대까지 쌓아놓은 모든 것을, 이성에 대한 믿음을 모두 부숴버림으로써 그는 전혀 새로운 철학의 시대를 열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니체를 망치를 든 철학자요, 예언자, 현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랍니다.
―제5장 현대 철학과 과학,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 중에서
입장이 곤란해진 영국은 이 문제를 국제연합(UN)에 넘겨버립니다. 국제연합에서는 2가지 안을 내놓았습니다. 어쩔 수 없으니 현 상태를 유지하며 하나의 연방하에 지내자는 ‘연방안’과 아예 2개의 나라로 나누어버리자는 ‘분할안’이었지요. 이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겸허히 연방안을 수용하려 했지만, 유대인과 미국이 분할안을 밀어붙였습니다. 그들이 내세운 분할이란 지중해 연안의 비옥하고 공업이 발달된 지역은 유대인이 갖고, 척박한 사막을 팔레스타인인이 갖는 것이었기 때문이지요. 유대인은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치열한 로비를 벌였고, 1947년 11월 국제연합은 분할안을 통과시킵니다. 이 황당한 상황 앞에서 전 아랍이 들끓었고, 유대인은 서둘러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했습니다. 이에 이집트, 레바논, 시리아 등 많은 아랍국들이 힘을 합쳐 이스라엘을 공격해 들어갑니다. 하지만 4차에 걸친 중동전쟁은 모두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고, 팔레스타인의 80퍼센트가 넘는 대부분의 지역이 이스라엘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지요. 그 과정에서 수많은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하기도 했답니다.
팔레스타인인들 중에는 최후의 방법으로 지하조직을 선택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1964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결성하고 집단적 저항운동을 확산시켜나갔습니다. 한때 의장인 아라파트(Yasser Arafat)가 이스라엘의 라빈(Yitzhak Rabin) 총리와 협상하여 평화를 이끌어내기도 했지만, 라빈 총리가 자국의 반대파에게 암살당하고 팔레스타인 내에서도 강경파들이 테러를 계속 자행해나갔지요. 이후 두 나라 모두 강경파들이 득세하면서 팔레스타인 문제는 그 끝이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랍니다.
―제6장 세계화와 그 이슈, 「테러와 전쟁이 들끓는 팔레스타인」 중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의 전횡으로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가 터져버리자, 월가에서는 1퍼센트를 향한 99퍼센트의 시위가 열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계화가 1퍼센트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에 공감하기 시작했지요. 사실 세계화에 대한 이러한 인식과 저항은 오래전부터 있었답니다.
아마도 반세계화 운동이 그 시작인데요, 이들은 1999년 11월 시애틀에서 세계경제기구의 부당함을 알리면서부터 전 세계에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2001년에는 브라질에서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기치 아래, 단순한 저항을 넘어 대안을 세우는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지요. 이 ‘대안 세계화 운동’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으며 현재 4만여 개의 NGO가 관여되어 있답니다. 이들은 외채 탕감, 세계금융기구 통제 등 다양한 사안을 논의하고 있는데요, 그중 토빈세(Tobin’s tax)를 소개해보겠습니다. 이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제임스 토빈(James Tobin)이 제안한 것으로, 외환 거래에 대해 전 세계적으로 0.2퍼센트 정도의 세금을 붙이자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투기자들의 이윤이 적어져 투기가 줄 것이고, 그만큼 환율이 안정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세금은 최소한 연 1,500억 달러에서 3천억 달러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이 정도면 국제연합이 지구상의 악성 빈곤과 환경 파괴를 제거하는 데 드는 비용과 비슷한 규모라고 합니다.
―제6장 세계화와 그 이슈, 「대안 세계화 운동과 부활을 꿈꾸는 케인스주의자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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