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 정(政).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그는 ‘하늘 아래 최초의 황제’라는 뜻에서 자신을 ‘시(始)황제’라고 칭했다. 황제란 “덕은 삼황(三皇)보다 낫고, 공적은 오제(五帝)보다 높다”라는 뜻으로 ‘왕 중의 왕’이라는 뜻이었다. 이는 곧 자신이 권력의 최고 정점임을 천하에 선포한 것으로, 그만큼 그의 자부심은 남달랐다. 하지만 현재 그는 500년 난세를 끝낸 유능한 군주가 아닌 ‘희대의 폭군’으로 인식되고 있다. 더욱이 출생을 둘러싼 논란 역시 끊이지 않고 있다. 거기에는 한 무제(漢武帝)의 진시황에 대한 지독한 콤플렉스가 한몫하고 있다.
---「帝 | 진시황 ―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중에서
조조는 필요에 따라 자유자재로 표정을 바꾸는 ‘안면 바꾸기’의 달인이었다. 화낼 때는 두 눈을 치켜뜨고 노려보고, 자애로워야 할 때는 그윽한 목소리로 다독여주며, 슬퍼해야 할 때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런 그의 얼굴 바꾸기에는 일관성이 숨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중원의 평화를 이룩하는 것에 둔 강렬한 자의식이다. “내가 세상 사람을 버릴지언정, 세상 사람이 나를 버리게 하지는 않겠다(寧敎我負天下人, 休敎天下人負我)”라는 그의 말 역시 거기서 비롯되었다.
---「我 | 조조 : 천하의 주인은 오직 나뿐」중에서
진정한 고수일수록 자신을 숨기는 데 능숙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유비는 진정한 고수였다. 동네 건달 출신에 다혈질이고, 매우 오만했던 그는 속마음을 숨기기 위해 천둥소리에 놀라는 척하며 들고 있던 숟가락을 떨어뜨리는 유약한 모습을 보였는가 하면, 어리석은 행동을 일삼았다. 또한, 철저한 이미지 관리를 통해 인자하고, 너그러운 사람으로 자신을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가진 자원도 적었을 뿐만 아니라 출발 역시 매우 늦었지만, 삼국의 한 축을 이끄는 영웅이 될 수 있었다.
---「德 | 유비 ― 유연하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중에서
국궁진력 사이후이(鞠躬盡力 死而後已). “공경하는 마음으로 몸을 낮춰 온 힘을 다하고, 죽은 후에야 그것을 멈춘다”라는 말이다. 이 말 만큼 제갈량의 삶을 잘 보여주는 문장은 없다. 이는 지방의 가난한 선비에 지나지 않았던 자신을 알아준 유비에 대한 마음으로, 그는 죽는 순간까지 삼고초려의 은혜를 잊지 않고 유비와 유선 2대를 섬겼다. 그의 시호가 ‘충무(忠武)’인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비록 군사보다는 내치에 더 치중했지만, 변치 않은 마음을 높기 산 것이다.
---「忠 | 제갈량 ― 국궁진력 사이후이(鞠躬盡力 死而後已)」중에서
가치부전(假痴不癲). 손자병법 삼십육계 중 27계 전략으로 “바보처럼 보여 난관을 극복하라”라는 뜻이다. 사마의는 이 전략을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10년 동안 중환자처럼 행세하며 세상일에 전혀 관심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면서도 제갈량의 꾀에 번번이 당했을 뿐만 아니라 콤플렉스에 내내 시달렸다. 하지만 『삼국지』 최후의 승자는 제갈량이 아닌 바로 그였다. 그만큼 그는 자신을 다스릴 줄 알았다.
---「忍 | 사마의 ―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 최후의 승장」중에서
못생긴 외모 때문에 번번이 퇴짜 맞은 ‘봉추(새끼 봉황)’, 방통. 성격이 곧고, 직선적이었던 그는 남에게 얽매이거나 구속되지 않는 ‘척당불기(倜?不羈, ‘뜻이 크고 기개가 있어 남에게 매이지 않는다’라는 뜻)’의 삶을 살았다. 출세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것이다. 한마디로 처세술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끝내 대붕(大鵬)이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한 채 날개가 꺾이고 말았다.
---「倜 | 방통 ― 끝내 대붕(大鵬)이 되지 못한 봉추(鳳雛)」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