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경험해보지 않으면 쉽게 생각하고 가볍게 말한다. 깨달음을 위해 부모도 자식도 버리고 출가한 사람들이 모여 수행하는 곳이 절이다. 사회 어느 곳보다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결실을 맺을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그곳을 차나 마시고 산사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는지…… 내가 무식해도 한참 무식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이 안정될 리가 없었다.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왜 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는데 왜 살아야 하는지, 그것이 문제였다. 휴학하는 동안, 나는 책이나 보고 쓸데없는 잡생각으로 소일했다. 이때 나에게 삶의 희망을 불어넣어준 책이 있었다. 고승들의 목숨을 건 구법여행과 뼈를 깎는 선(禪) 수행 체험기였다. --- pp.38~39
불교가 철학과 다른 점은 인간의 감성을 중시하는 데 있다. 다른 생명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다른 생명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지식만으로는 사랑이 따르지 않는다. 다른 생명을 내 몸처럼 느끼는 감성이 있을 때, 그들의 기쁨과 고통은 곧 나의 기쁨과 고통이 되고 자연스럽게 내 몸처럼 그들을 사랑하게 된다. 이 자연스러운 감성은 수행에 의해 지혜가 생겨날 때 저절로 우러난다. 깨달은 자도 인간적인 감성과 정 때문에 죽음에 대해 슬퍼한다. 그러나 정 때문에 죽음을 슬퍼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는 깨달은 자라고 할 수 없다. 범부는 자신과 가깝거나 자신에게 잘해주었던 고인에 대해서만 슬퍼한다. 그리고 그 슬픔이 크면 클수록 슬픔의 그림자가 마음속에 오래 남아 슬픔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깨달은 자는 모든 생명의 죽음에 대해 슬퍼한다. 슬퍼할 때는 온 천지 가득 슬픔밖에 없지만 그 슬픔이 그의 마음을 묶어놓지는 않는다. 아무리 번개가 쳐도 하늘은 멍들지 않듯이, 슬픔의 순간이 지나고 일상으로 돌아와 사람을 만나거나 일을 할 때, 그에게는 슬픔의 그림자가 없다. 오직 사람 만나는 것과 일에만 열중할 뿐이다. --- pp.82~83
일주일에 원고지 30장씩 써간다는 것은 피를 말리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나의 작전이다. 평소 의지박약인 내 성격으로 미루어보면 일주일에 원고지 30장을 써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약속이나 기한을 정하면 기필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마침내 이루어냈다. 간혹 나는 공부를 하는 데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운’이라는 것은 복권 같은 것에 잘 걸리는 요행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운’은 결코 저절로 오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의지로 자기 인생을 개척해나갈 수 있다고 한다. 나의 경우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는 주위의 반대도 심했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강한 정신력과 의지로 주위를 변화시켰고, 그 변화는 정신적으로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내게 도움을 주었다. 이로 인해 나는 더욱더 열심히 노력했고 결과적으로 ‘운’을 얻게 된 것이다. --- pp.90~92
아무리 추운 영하의 겨울날에도 일본 선방에는 불기 한 점 없다. 난방은 전혀 하지 않는다. 땅바닥은 차디찬 돌바닥. 방석 밑의 다다미에는 온기가 있을 리 없다. 게다가 좌선할 때는 한겨울에도 선방의 출입문과 그 많은 창문을 모두 다 활짝 열어놓는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고 바람까지 부는 날이면 그 추위는 상상을 초월한다. 손발이 얼고 어떤 때는 추워서 이빨까지 탁탁 부딪쳤다. 여기저기서 “으으……” 하며 추위 참는 소리도 간간이 들렸다. 물걸레로 닦은 법당 마룻바닥에는 살얼음이 맺혔고, 실내 화장실 입구 수도꼭지에는 고드름이 달렸다. 스님들은 늘 맨발로 생활하며 상하 긴소매 내의도 입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계단을 오를 때면 승복 아래로 무릎까지 맨살이 그대로 드러난다. 합장할 때는 팔꿈치까지도 맨살이 보인다. 여름 옷차림이나 겨울 옷차림이나 항상 정해진 대로만 입도록 되어 있다. 여름에는 땀투성이가 되지만, 겨울에는 펄럭이는 승복 사이로 찬 기운이 종횡무진으로 속살을 파고든다. 나는 재가자라서 옷 입는 것에 제한을 받지 않아 두껍게 입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살을 파고드는 추위는 감당하기 힘들었고 양말을 신지 않은 발은 동상에 걸렸다.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추위였다. --- pp.132~133
방장 스님은 화두의 내용이나 화두를 드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으셨다.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만 말씀하셨다.
“지금까지 익힌 학문은 완전히 버리고, ‘무’ 그 자체가 되어라. 결코 쉽지도 않고 오래 앉아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몇 년씩 해도 안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주일 만에 목적을 달성하는 사람도 있다. 이번 일주일 만에 ‘무’를 뚫고 가라. 머리에서 나온 답은 소용이 없다. 온몸으로 체험한 경지라야 한다. ‘무’와 내가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게 하라. 자신을 잊고, 만사를 잊고, ‘무’와 하나가 될 때까지 계속 좌선하라.”
“‘무’ 그 자체가 되었는가?”
“이것은 자신이 스스로 노력하여 아는 방법 외에는 길이 없다. 자신도 잊고 모든 것을 잊을 때까지 ‘무-’ 하면서 ‘무’를 놓치지 말고 계속 앉아라. 단지 ‘무’밖에 모르는 바보가 되라. 그러면 비로소 무와 하나가 될 것이다.” --- pp.137~139
‘무’자 화두를 참구한 지 몇 년이 지났을 때였다. 좌선 중 어느 순간, 나는 광활한 우주 공간에서 영원과 무한을 보았다. 나는 영원·무한과 분리될 수 없었기 때문에 저절로 그 자체였다. 무한을 감지한 순간,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모든 것을 알고 느낄 수 있었다. 우주와 대지, 산과 바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살아 있었고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였다. 화석이 된 패총의 조개껍데기들이 살아 움직였고, 그곳에 과거·현재·미래가 함께 공존하고 있음을 보았다. 나는 역동적인 힘을 느꼈다. 패총의 화석들이 바로 내 몸의 세포로 여겨졌으며, 내 몸 세포인 패총들은 온 우주로 무한히 이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몇 시간 동안 계속 좌선했다. 그러나 방금 앉은 듯한 느낌이면서 또한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그렇게 앉아 있은 듯이 한없이 평온하고 편안했다. 머리는 밤하늘에 꽉 찬 무수한 별처럼 총총하고 맑았으며, 온몸은 찬물에 샤워를 한 듯이 청결하고 산뜻했다. 그 뒤로 나는 현실에서 만물이 살아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는 체험을 했으며 그때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경이로움으로 온몸이 떨렸다. 그 감동은 며칠간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