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이런 양면적 성격, 카리스마 넘치는 에너지와 대범함에 대조되는 내향적이고 외로움을 타는 성격은 그의 작품 활동에 여실히 반영되고 이따금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이 양면성이 학교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지 조심스러웠기에, 나라는 특히 초기 회화들에서 자신의 성격적 특성들을 내보이는 데 더 방어적이고 어린 시절 서사들을 이용해 당시 자신의 실체를 모호하게 만든다. 그러나 회화가 아닌 그림들에서는 음흉한 유머, 폭발적인 에너지, 그러면서도 좀 더 관조적인 면이 쉽사리 드러난다.
---「음악과 함께 시작된」중에서
가와이라는 용어는, 1990년대 중반 나라가 일본과 해외에서 더 광범위한 관중을 끌면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2001년에는 영향력이 컸던 예술가 무라카미 다카시의 슈퍼플랫 선언에서 전유되면서 세계적 주류 미술의 어휘 중 하나가 되었다. 가와이의 핵심 의미들에 대한 검토는, 나라의 회화 전략 변화, 일본 하위문화에의 참여, 슈퍼플랫 담론 내 관련성과 한계점 등을 살펴보기 위한 토대가 된다.
---「저 큰 머리 소녀들」중에서
2001년은 일본의 주도적 현대 미술가 중 하나로 급속히 유명해진 나라에게 이력의 중요한 전환기였다. 이때 그의 활동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나라는 예술계의 다른 분야나 다른 창조적 업계의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프로젝트를 맡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의 설명처럼 자신으로부터, 아니면 성공에 따라오는 요구들의 불협화음으로부터 도망치는 방법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엄밀한 의미에서 협업이라기보다는 실험이었고 나라는 다양한 유형의 창조적 관계를 형성하며 예술가, 디자이너, 뮤지션, 도예가들과 가깝게, 실제로 만나서 일하거나 예술적 유대감을 통해 함께 작업했다. 이런 창조적 관계들을 통해 나라는 평정심을 찾고 자신의 작업과 활동을 돌아보고 사적 세계와 공적 세계를 타협시킬 방법을 배울 수 있었으며, 좀 성공적인 것들도 있었다.
---「타인과 함께 작업하기」중에서
비록 나라는 공공연하게 정치적인 예술가는 아니지만 그 여행 전에도 반전과 반핵을 테마로 한 작품들을 일궈왔다. 그것이 그가 ‘전쟁 반대’ 이슈에 기고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많은 이유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일본으로 돌아온 나라는, 원래 새 회화를 제작해 이를 중심으로 작업하려 했었지만, 그릴 수가 없음을 깨달았다. 전쟁의 여파를 그토록 가까이서 목격한 후 내면에서 충돌하는 감정들을 처리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라는 항상 인간성의 선함과 사람들과 그들이 사는 장소 사이 근본적인 조화를 믿었고, 그의 회화들은 그런 공감의 중요성에 대한 표명이었다. 장난을 치거나 분노하는 소녀들이 그려질 때도 풍부한 색채는 희망을 믿고 싶은 우리 내면 어딘가에 와 닿는 따뜻함을 발산한다. 그러나 인간 폭력성의 흔적을 극심하게 느낀 아프가니스탄 체류 이후, 나라는 자신의 오랜 신념을 회의하며 감정들을 캔버스에 전달하는 자신의 능력에 혼란을 느꼈다.
---「카메라와 함께한 여행」중에서
이때쯤 나라는 후쿠시마에서 열리는 전시에 초청받았다. 재난으로 집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 피난 캠프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날 기회를 제공하자는 행사였다. 하지만 나라는 자신에게 적절하지 않은 방식이라고 느꼈다. 그는 직접적인 관여를, 그의 예술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 활동을 원했다. 대신 나라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후쿠시마에서 격식 없는 대화의 자리를 마련했다. 소마 히가시 고등학교 미술 동아리와의 간담회에서는 학생들이 나라에게 집 안의 물건들이 떠내려가는 급류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소의 등에 매달렸던 이야기 같은 것들을 들려주었고 또 어떤 경우는 나라가 임시 대피소로 쓰이는 체육관을 방문해 그곳 사람들에게 그들의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질문하기도 했다. 대답은 거의 항상 같았는데, 잠시 동안이라도 잊어버릴 수 있게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북쪽으로의 귀환」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