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티어는 미국인의 유전자인가? 말도 안 되는 우문(愚問)이지만, 프런티어가 오늘날 미국인의 삶에서 여전히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에 비추어본다면 이해할 수도 있는 과장법으로 보는 게 옳으리라. 잠시 가치 판단을 배제하고 프런티어 사관을 미국인의 문화적 기질에 국한시켜본다면 매우 설득력이 높다는 걸 인정하긴 어렵지 않다. 부정적인 측면에서만 보자면, 국제적으로 난폭하게 구는 카우보이 기질과 그 바탕이라 할 인종차별주의나 엄청난 자원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물질주의적이고 소비주의적인 삶은 확실히 미국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노다지’를 잡으려는 한탕주의 속성이 강하며 그것이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으로 미화되어왔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겠다. 그러나 동시에 ‘동전의 양면’ 원리처럼 그 이면의 특성이 미국의 활력이자 저력이라는 점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프런티어는 미국인의 유전자인가?」중에서
카네기가 세운 자선사업의 전통은 오늘날 빌 게이츠를 비롯한 미국 부자들의 왕성한 기부 활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100년이라는 시차만 있을 뿐 빌 게이츠는 카네기의 환생(還生)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런데 좌파들은 이에 대해 비판적이다. 예컨대, 슬라보이 지제크(Slavoj Zizek)는 빌 게이츠의 기부 활동에 대해 “경제적 착취를 박애주의라는 가면으로 숨기려는 행동”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한국에선 그런 비판보다는 한국 재벌들에게 경고하기 위한 ‘카네기 예찬론’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 “왜 미국 부자들은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는가?” 카네기에서 빌 게이츠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대부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개같이 돈을 벌어 정승같이 쓰는 두 얼굴을 보이고 있다. 왜 그럴까? 물론 답은 ‘인정욕구’에 있다.
---「왜 미국 부자들은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는가?」중에서
‘빅 3’는 구제금융으로 연명하다가 2010년 ‘도요타 리콜 사태’를 계기로 회생하게 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2012년 실적 집계 결과 GM은 ‘안방’에서 선전한 것에 힘입어 3년 연속 흑자를 기록했다지만, 순이익 규모는 전년 대비 36퍼센트 감소했고 전반적인 자동차 부문은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어 앞으로 계속 두고볼 일이다. 그러나 미국의 자동차 산업이 어떻게 되건 이미 자신들의 영혼이 된 자동차에 대한 미국인들의 신앙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자동차는 ‘아메리칸 드림’인 동시에 그 ‘드림’과는 달리 갈수록 소외되고 왜소해지는 인간의 마지막 피난처이기 때문이다. 운전대를 잡을 때에 비로소 만끽할 수 있는 ‘권력감정’만으로도 미국인들은 자동차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결코 멈추지 않으리라.
---「왜 미국은 자동차 산업의 패권을 잃었는가?」중에서
예수가 광고인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해주었다면, 기업 CEO들이 예수에게서 배울 게 왜 없겠는가? 오늘날에도 예수를 기업 CEO 리더십의 이상으로 여기는 책이 많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런 책들은 예수를 ‘섬김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의 원조로 여기면서 “예수처럼 팀을 꾸려 팀플레이를 해야 한다”거나 “모든 걸 버리고 따를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는 등의 처방을 제시한다. 1967년 바턴이 죽자 영국 저널리스트 앨리스터 쿡(Alistair Cooke, 1908~2004)은 바턴에게 ‘광고의 모세(Moses of advertising)’라는 타이틀을 헌납했다지만, 바턴은 더 넓은 맥락에서 광고가 미국 정신의 핵심임을 간파한 인물로 평가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미국은 유럽에서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한 광고, 그것도 과대 광고에 의존해 건국된 나라가 아닌가.
---「예수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세일즈맨’인가?」중에서
카네기의 주요 상품이 새로운 스타일의 미국식 자본주의라면, 오늘날 유행하는 팝 사이콜로지(pop psychology, 대중심리학)는 그 자본주의에 짓눌려 피폐해진 또는 피폐해질까봐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힐링과 멘토링을 주기 위한 건 아닐까? 날이 갈수록 인맥의 중요성이 더해지면서, ‘친구를 얻고 사람을 움직이는 방법’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삶의 문법이기에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카네기의 후예들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거시적 분석’과 ‘미시적 실천’ 사이의 괴리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생존과 성장을 위해 애쓰는 대중은 여전히 카네기에 열광한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을 포함하여 전 세계적으로 열리는 그 수많은 카네기 관련 프로그램의 성황을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친구를 얻고 사람을 움직일 것인가?」중에서
‘한 방울 원칙’은 사라지는 게 옳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브라질 식’이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인종 간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부모의 인종 중 낮은 쪽 지위를 물려받는 것을 하이포디센트(hypodescent), 높은 쪽 지위를 물려받는 것을 하이퍼디센트(hyperdescent)라고 하는데, 둘 다 인종차별을 전제로 한 개념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이퍼디센트를 취하는 브라질도 ‘인종차별 없는 나라’로 알려진 신화와는 달리 정치경제적으론 철저하게 ‘백인 지배 사회’가 아닌가 말이다. 최종 해법은 아닐망정, 결국 경제적 권력의 집중을 막고 빈부 양극화를 개선하는 게 인종문제 해결의 현실적 해법일 수 있다. 인종차별이 존재하는 어느 나라에서건 성공한 유색인의 다수가 인종차별에 대해선 비판적 자세를 취하면서도 아내는 백인을 취하는 걸 ‘위선’이라고 비판할 게 아니라, 그 숨은 뜻을 슬기롭게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
---「왜 버락 오바마는 혼혈인이 아닌 흑인인가?」중에서
2011년 1월 아이젠하워의 대국민 고별연설 50주년 기념식을 계기로 군산복합체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벌어졌지만, 보수파의 주장은 한결같았다. 아이젠하워의 연설 당시에도 국방부는 아이젠하워의 진의가 왜곡되었다고 주장했는데, 여전히 그 타령이다. 보수 논객 빈센트 칸나토(Vincent Cannato)는 『내셔널 리뷰』 기고문에서 아이젠하워는 단지 국방부의 방만하고 낭비가 심한 군사비 비출과 군수물자 조달정책을 경고하면서 재정지출을 규제할 것을 촉구했을 뿐인데 좌파가 불순한 정치적 의도를 갖고 아이젠하워의 말을 멋대로 인용하는 바람에 공연한 오해만 생겼다고 주장했다. 데이비드 그린버그(David Greenberg)도 『워싱턴포스트』에서 운영하는 웹진 ‘슬레이트’에서 아이젠하워의 연설은 잘못 이해되었고 군산복합체를 비난하는 것은 나태하고 진부하며 히스테리에서 나온 짓이라고 단정했다. 보수파의 주장이 이렇게 확고한데다, 미국인들은 전지구적인 군사 우월주의라는 꿈을 버릴 뜻이 없으니, 군산복합체는 사라지기 어려울 것이다.
---「전쟁은 ‘아메리칸 드림’을 위한 조건인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