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목하는 것은 일본인이 보여준 오타쿠적인 기질이다. 원래 '오타쿠'란 말이 그리 좋은 뜻으로 쓰이는 것은 아니지만, 어찌 보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끈질기게 탐닉하는 일본인의 마음 한구석에는 모두 작은 '오타쿠'들이 들어 있지 않나 싶다. 그리고 '그 마음속의 작은 오타쿠들이 세계적인 자동차를, 기계 부품을, 스시를, 소설을, 영화를,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나는 이번 도쿄 여행에서 일본인의 마음속에 숨은 작은 오타쿠들을 구경하고, 따라가 보았다. 사이비 오타쿠가 되어 아키하바라 지역을 탐험한다든지 신장 180cm 이하의 30대 남성으로 도쿄 쇼핑 가이드를 써본다든지, 나름 이 나라 문화계 종사자로서 일본의 신문물을 접하는 조선 수신사의 마음으로, 도쿄의 새로운 것을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하려고 했다. 이 편협하고 소소한 기록이 차후에 여행하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 'EPISODE 01 도쿄로 떠나다' 중에서
"나는 정처 없이 걷다가 어느 골목의 작은 셀렉트 숍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판매하는 물건보다는 거기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반해 물건을 고르는 척하며 음악을 듣고 있었다. 한참을 듣다 보니 음악이 너무 좋아 용기를 내어 주인장에게 물었다. "이 음악은 누구 음악인가요? 어디서 살 수 있을까요?"라고. 주인장은 친절하게도 약도를 그려주었다. 그가 그려준 약도대로 10여 분을 걸어가니, 그곳에 오래된 레코드 숍 '무드스빌Mood‘sVilll'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무드스빌'에서 그 음악 CD를 살 수 없었다. 그 음악은 진보초 상인을 위해 상인조합에서 만든 컴필레이션 음반이고, 지금은 재고가 없어 중고로밖에 구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한 번 듣고 좋다고 생각한 음악은 어떻게든 알아내서 갖고야 마는 성격이라, 중고 음반이더라도 그 음악을 소유하고 싶었다. 결국 '무드스빌'의 주인장이 그려준 또 다른 약도를 들고 중고 레코드 숍이 많은 한 동네에 갔는데, 그곳이 바로 진보초 헌책방 거리다."--- 'EPISODE 02 '상실의 시대' 거리에서 싱글 CD를 찾아 나서다' 중에서
"식도락에 유난히 관심이 많은 나이기에 긴자 미쓰코시 백화점 지하에 가면 미칠 것 같다. 가능하다면 지하 3개 층에 진열된 모든 음식을 다 먹고 싶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처럼 천국 같은 백화점 구어메에도 뭔가 애매한 면이 있는데, 이렇게 침을 흘리면서 그 맛을 기대하며 구입한 음식을 먹을 장소가 없다는 점이다. 그 날도 식탐 폭주 상태로 식품부를 두어 바퀴 돌다 보니 이미 양손에 온갖 도시락과 반찬거리가 수북이 들려 있었다. 그때였다. '이걸 어쩌나' 하고 고민하는 나에게 백화점 여직원이 말을 걸어왔다. 백화점 옆 건물의 옥상에 올라가면 도시락을 먹을 만한 장소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친절함을 뒤로하고 올라간 옆 건물 옥상은 내 기대와 달리 번듯한 테이블이나 의자 하나 없었다. 그저 벤치 몇 개와 행사용 간이 의자가 수북이 쌓여 있었을 뿐. 심지어 비바람이 불기 시작하니 쌀쌀하기까지 했다. 어쩐지 서러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어이없는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맛있게 도시락과 음식을 먹어치웠다. 허기를 채우고 주변을 살펴보니, 내 맞은편 벤치에 백화점 직원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유니폼을 입고 있었다)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다가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아, 도시락은 너무 맛있고, 비바람은 몰아치고, 여인은 흐느끼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3가지 상황이 한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오묘한 상황을 추억하고 싶었던 나는 이 광경을 흑백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EPISODE 04 긴자 미쓰코시 백화점 런치' 중에서
FASHION MODEL, 야니의 엄마, 그리고 도쿄 여행자 이유
"예전엔 '도쿄 쇼핑' 하면 하라주쿠의 다케시타 스트리트를 떠올렸다. 나도 어릴 땐 앙증맞은 디자인의 양 말, 당시만 해도 흔치 않은 컨버스 스니커즈, 독특한 무늬의 프린트 티셔츠, 코스프레 복장이 가득한 이곳 을 쇼핑하면서 좋아하곤 했다. 하지만 나이 들면서부터 다케시타 스트리트에 더 이상 가지 않았다. '도쿄 패션 쇼핑'을 주제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후 매번 '어디 새로운 곳이 없나' 찾고 있으면서도, 다케시타 스트리트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황이가 무심하게 말했다. "팔린Faline에 가 봐."라고.
팔린은 입구부터 범상치가 않다. 언뜻 보면 코스프레 의상을 팔 것 같지만,막상 숍 안으로 들어가면 오모 테산도의 여느 편집 숍 못지않게 감각적이고 시크한 패션 아이템으로 가득하다. 신진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바잉해 선보이는 것이 최근 멀티숍의 트렌드지만, 팔린의 바잉은 '크레이지!'라고 느낄 정도로 실험적이다."--- '다케시타 스트리트에 꼭꼭 숨은 보물 편집 숍 FALINE' 중에서
"가끔 '티셔츠'를 주제로 인터뷰를 요청해 오는 패션 에디터들에게 나는 항상 똑같은 말을 한다. "티셔츠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처음 구입했을 때처럼 흐트러짐이 없어야 한다"라고. 시간이 지나면서 색깔이 바래고 티셔츠 형태도 조금씩 바뀌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게 맞춘 옷처럼 자연스럽게 낡아서 '아, 더 낡아서 버려야 되는 날이 오면 어쩌지' 하고 걱정되는 티셔츠가 있는 반면, '이제는 입기 싫다'고 버려지는 티셔츠가 있다. 내게 '흐트러짐' 이란 뜻은 바로 '가치가 바래는' 것과 동의어인 셈이다. 언더커버의 티셔츠는 내게서 버려지는 법이 없다. 언더커버 티셔츠의 심플한 프린트는 언제 봐도 멋스럽고, 소재 역시 시간이 흐를수록 내추럴하다."--- '입을수록 빛나는 티셔츠 UNDERCOVER' 중에서
"브랜드 숍이나 멀티숍은 여행 중에 한 번 꼼꼼히 쇼핑하면 충분하지만, 래그태그 같은 중고 숍은 수시로 물건이 들어오고 나가기 때문에 쇼핑 타이밍이 중요하다. 운이 좋아야만 핫한 아이템을 건질 수 있기에, 나는 운을 거머쥐기 위해서 래그태그를 자주 찾는 셈이다. 도쿄 곳곳에 래그태그가 있는데, 내가 가장 좋아 하는 곳은 시부야점이다. 규모도 가장 크고,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 물건도 다양한 데다 무엇보다 마르지 엘라, 요지 야마모토, 언더커버, 꼼데가르송 등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가 많기 때문이다. 나와는 궁합이 잘 맞는다고 할까."--- '빈티지가 아닌, 세컨드 핸드 패션 숍 RAGTAG' 중에서
푸드 스타일리스트, 글 쓰는 미식여행가 박재은
"나는 음식을 하는 사람이니까 여행의 매 끼마다 맛있는 것만 먹고 싶은 욕심이 있다. 하지만 여행지에서 가뜩이나 빠듯한 여비로 매번 미식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가격대별로 맛집 리스트를 확보해두는 거였다. 500 엔짜리 동전 2개로 먹을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내 입에 맞는 메뉴, 1,000엔짜리 지폐 2장으로 먹을 수 있는 호사로운 음식, 작정하고 찾은 고급 레스토랑 등 주머니 사정에 맞춰 미식을 할 수 있는 도쿄 맛집 리스트 말이다."
시작하는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