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은 賢者다
그가 무안해 할까봐 나도 마냥 흔들렸다
캄캄한 혼잣말에 물든 그를
누구는 징역소라 읽고
누구는 스스로를 내보이지 않는 노래의 검은 흉터라 쓴다
맨날
자기만 들여다보는 말더듬이들
나무를 껴안고 혼잣말을 다 비우지 못한다
하여
나, 귀 기울이네
됐다,
이제 됐다,
다만 견뎌낼 뿐
숲은 너그럽다
맨발로 사막을 건너던 성녀처럼
날마다
세상의 큰 꽃, 노을이더라
---「숲, 고해소 1」중에서
그늘받이가 된 볕받이
연두 따라 오르는 물소리, 새소리, 벌레소리
아이 보채는 소리, 투덜거리는 소리
온갖 소리가 어울려있는 거대한 침묵, 깊은 바다
죄 없는 죄책감들이 서로를 원망하며
쓸쓸함의 정겨움을 알아차리던 혼잣말들
나, 귀 기울이네
그 또한 다른 나의 이름이기에
무릎보다 마음이 먼저 꺾이던 날들
울 힘이 없는 그대 대신 울어 주리라
흉터에 새로 피는 잎은 없다
마파람에 누울 듯 버티던 푸른 의문들
성긴 어둠을 지켜내듯 더 높은 곳에 새 순을 틔운다
숲,
한 번도 잡아주지 못했던 타인의 여윈 손을 잡아주는 거기
---「숲, 고해소 2」중에서
나무를 쓰다듬자 혼잣말에 지친 이파리들이
우수수, 쏟아지네
한숨 자국 선명한 나이테 안에
다 담아내지 못한 말들은 나무 뒤에 캄캄하게 서있네
산 자들의 마을을 기웃거리던 바람
풀들이 구름처럼 일어서는 이 몽유의 높이를 가늠 못하는
저 바깥을 손짓하며 늘 그 길로 오네
아직 어두우나
숲의 언어는 여전히 동이 튼다고 쓰여 있어
오래 망설였을 거야
숲이 깨어나네
책장 넘기듯 가슴이 뛰네
저녁 못물을 지켜보듯
죄가 그리워지는 황혼 어른댈 녘까지 예서 머물겠네
---「숲, 고해소 3」중에서
아침을 데리고 온
꽁지가 붉은 새의 숨을 내 갈피에 넣는다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나를 열댓 바퀴쯤 돌고 간
그 새가 나뭇가지 하나면 잠드는 것이 충분하다고 일러주네
내 피가 순해지고
그의 왼 손을 내 오른 손으로 잡고 걷던 길
누군가 불러준 휘파람이 있고
누군가에게 불러준 휘파람이 있어
그러다, 그러다 아무 마음도 못 만나고 돌아간 마음도 있다
나무에 그 새가 앉듯 내 어깨도 내어주려다
문득, 풍뎅이 여섯 발을 아무 미움 없이 부러뜨린 유년의 기억은
택도 없지, 접는다
가쁜 숨으로 가뿐히 날아가는 새를 보며
울컥, 고개 드는 하늘나리
쌓일 곳을 찾던 혼잣말들이 숨어들고
세상은 멀리서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숲, 고해소 4」중에서
가을은 산굼부리 갈대숲에 서있었다
바닷바람 앞에서 서두는 그들의 춤은 탈출이었다
기진한 그들이 분화구 언덕을 수의처럼 덮었다
세상 뒤 쪽에서, 더 뒤 쪽으로 숲을 밟고 건너갔다
오래 숨어있어 파래진 얼굴 산도라지도 따라갔다
생각이 많은 것들은 고요가 깊었다
한 바람에도 수천의 얼굴이 함께 누웠고
수천의 얼굴이 함께 어두워졌다
이 언덕이 이렇게 빛나는 한 때를 가졌다는 게
가슴에 더운 피를 돌게 해
구멍 숭숭한 돌들 사이에서 다시 깨어나지 않아도 좋았다
바람에 맞서는 그들의 춤은
마구, 또 일어나 적막을 덮는다
더 이상 젊지 않음을 알아차린 가을
갈대숲 은비늘에 찔린 서녘하늘을 감싸 안는다
---「숲, 고해소 5」중에서
잎사귀들
눈발에 불타듯 날린다
골짜기를 메우던 물길은 말을 줄이고
하늘은 무겁고
거울처럼 쨍한 웃음으로 바람은 날아가고
괜시리 급해지는 마음
손바닥 펴 다독여 보는 저물녘
이끼 켜켜 앉은 도시로 다들 돌아가고
나는 12월에 앉아있다
한 줄 글귀가 한 편의 시를 끌고 오듯 12월은
나를, 비틀거리는 한 생을 끌고 온다
그래도
투덜거리듯 혼잣말 건네며
따숩게 일어서는 섣달 그믐달
내 안에 고요가 열리면
꽃 같은 기억, 돌팔매 같은 기억들 위에서 흔들린다, 웃는다
12월의 그림자는 길다
---「12월의 그림자는 길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