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는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입에 펜을 물었다. 그리고 펼쳐 두었던 십자말풀이를 계속했다.
‘16번 가로를 풀 차례군. 영화 속 비밀 요원이고, 모두 다섯 글자라……. 뭐야, 너무 쉽잖아.’
라라는 빈칸에 ‘제임스 본드’라고 적어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사람도 비밀 요원이었지.’
라라는 자신의 원래 이름인 ‘GM451’을 떠올렸다. 그것은 영국 정부 소속의 ‘비밀 정보부’에서 붙여 준 것이었다. 고도의 학습 훈련을 통해 라라를 특수 요원으로 만들어 준 것도 비밀 정보부였다.
사실 ‘라라’라는 이름은 ‘공격과 구출이 허가된 동물’이라는 영어 문장의 머리글자였다. 한마디로 라라는 애견계의 제임스 본드 같은 존재였다. 물론 영화 007 시리즈의 주인공 제임스 본드처럼 세련되고 근사한 외모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라라는 생각했다.
‘사실 내가 그렇게 못생긴 건 아니잖아. 그냥 좀 독특할 뿐이지.’
라라는 래브라도 리트리버만 한 크기였다. 몸통은 흰색이었지만, 등과 배 그리고 얼굴에 검은 점이 몇 개 있었다. 언뜻 보면 꼭 젖소의 얼룩무늬 같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할 때마다 라라는 거세게 항의했다.
‘세상에, 젖소라니! 그 녀석들은 지저분하고, 냄새나고, 멍청한 데다, 꼬리에 진흙까지 덕지덕지 붙이고 다니는데 어떻게 나랑 비교할 수가 있지? 알다시피 난 매일 아침 깨끗하게 샤워하고, 무지무지 똑똑한데 말이야. 게다가 난 볼일은 꼭 화장실에서 본다고. 그러니까 비슷하다는 얘기는 꺼내지도 마.’
--- pp.16~18
라라는 사람의 언어로 말하는 법을 꼭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스파이 학교 특수 훈련 프로그램’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라라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난 컴퓨터로 메일을 쓸 수 있어. 입에 연필만 물면 자판을 두드릴 수 있으니까. 또 운동도 아주 잘하지. 축구, 체조, 수영, 그리고 태권도는 나를 따라올 자가 없다고. 또 자동차 운전, 배나 비행기 조종, 말타기, 폭탄 제거도 할 수 있어. 숨은그림찾기, 장기 두기, 시 짓기도 문제없지. 도대체 이런 일을 척척 해낼 수 있는 개가 얼마나 되겠냐고! 게다가 난 수학, 영어, 과학에서 모두 최고 성적을 받았다고. 내가 시험에서 떨어져 본 과목은 오로지 음악뿐이야. 그리고 그건 모두 이 발 때문이었지.’
라라가 앞발을 들어 올렸다.
‘요 녀석들로 어떻게 멋지게 피아노를 칠 수 있겠어?’
라라는 발가락을 이리저리 꼬무락거리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앞발이 좀 더 사람 손같이 생겼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라가 아쉬움을 달래며 앞발로 리모컨을 꾹 눌렀다. 텔레비전 화면이 뉴스에서 ‘퀴즈 쇼’로 바뀌었다.
‘너무 쉽군.’
라라는 ‘백만장자 퀴즈 쇼’에 나오는 모든 문제의 답을 맞힐 수 있었다. 덕분에 코텍스 교수의 ‘전화 찬스 때 도움을 청할 친구 목록’에는 라라의 이름도 올라 있었다.
라라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교수님은 말씀하셨지. 1번, 2번, 3번, 4번 중에서 정답인 보기가 나올 때 컹컹 짖기만 하면 된다고 말이야.’
라라는 잰걸음으로 부엌으로 가 과자가 든 깡통을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비밀 정보부 일을 그만두었던 그날을 생각했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내 인생 최고의 날이었어. 비밀 요원으로 일하는 것도 좋았지만, 가족에게 사랑을 받으면 사는 건 훨씬 더 멋진 일이거든.’
--- pp.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