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함의 기준은 무엇인가? ‘찻잔’은 사소한 것이고, ‘출가’는 위대한 것인가? 흔히 출가를 가리켜 ‘위대한 포기’라는 표현을 쓴다. 그 위대한 포기가 지리산 토굴 시절 작은 찻잔과 인연이 닿지 않았다면 난 아마 지금의 수행자로 남아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소한 찻잔’ 하나가 수행의 의지처가 되고 위대한 포기의 밑거름이 되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이다.
---「6쪽, 동은, ‘시작하며’」중에서
천 리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자 할진댄 누각을 한 층 더 올라가야 하고, 백척간두에 서면 한 걸음 더 내딛어야 한다. 그때 보이는 것과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를 것이다. 마치 처음인 것처럼 다시 보고, 듣고, 느껴보자!
---「7쪽, 진광, ‘시작하며’」중에서
산사 일주문에 매달려 있는 풍경들은 그 절의 온갖 애환을 간직한 타임캡슐과도 같다. 바람결에 그 절절한 사연들을 모두 풀어내며 무상법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나의 가슴 아픈 추억의 한 장면도 월정사 일주문 밖 어디쯤에선가 서성이고 있을 게다.
---「11쪽, 동은, ‘일주문’」중에서
좌복은 단순히 좌복만이 아니다. 하나의 좌복은 수좌의 의자이자 침구이며 또한 진리를 드러내는 법구이자 수좌의 정진을 상징하는 표상과도 같다. 즉 좌복은 진리의 자리인 연화대이자, ‘선의 황금시대’를 향한 꿈과 희망 그리고 깨달음의 증거인 것이다.
---「33~34쪽, 진광, ‘의자’」중에서
‘여기’에 사는 중생들은 늘 고된 삶을 부지하며, ‘거기’에 있다는 행복을 얻기 위해 죽을 때까지 애를 쓴다. 그러나 그렇게 애를 써도 결국에는 다 이루지 못하고 거기로 간다. 어찌 보면 우리네 인생 자체가 ‘여기’에서 ‘거기’로 지향하는 원을 세우고 하나씩 이루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39쪽, 동은, ‘차안과 피안’」중에서
운주사 와불 옆에 가만히 누워 생각한다. 민초들의 벗이 되고 그들을 하늘로 알고 섬기노라면 운주사 와불은 어느 날 시나브로 일어나 새로운 세상을 열 것이라고. 새날, 새 세상, 새 사람만이 오늘과 내일의 희망이자 깨달음이라고. 나 역시 운주사 와불처럼 이 세상과 중생의 짐을 이고 진 채, 세상과 중생에게로 당당히 걸어가고 싶다.
---「59쪽, 진광, ‘와불’」중에서
나는 오래전부터 사람은 존재가 아니라 바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문득 바람 냄새를 맡게 될 때 가슴 아린 그리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 (…) 내 삶에서 ‘어제의 바람’은 병든 한 청년이 고뇌하던 질풍노도의 바람이었다. ‘오늘의 바람’은 불보살님의 가피로 다시 태어난 행복한 수행자의 바람이다. ‘내일의 바람’은 따뜻한 훈풍으로 중생들 곁으로 다가가는 바람이다.
---「70쪽, 동은, ‘바람’」중에서
나는 지금도 매 순간, 매일매일 또 다른 출가(出家)를 꿈꾼다. 출가는 단순히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이 세계와 나 자신으로부터 ‘버림’과 ‘떠남’이 참 출가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 법이다. 그렇게 우리는 본래 내 집으로 돌아가려는, 귀가도중(歸家途中)의 영원한 나그네다.
---「76쪽, 진광, ‘출가’」중에서
‘황금’이란 꽃이 지나간 시간이라면, ‘지금’이란 꽃은 내가 얼마든지 쓸 수 있는 금이다. 살다가 문득 마음을 담아 누군가에게 준 꽃을 소환하고 싶을 때는 잘 생각해야 한다. 언젠가 ‘지금’이라는 꽃도 다시 소환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지금 돌아보면 안타깝고 아쉬울 따름이지만 그 순간순간들이 모두 내 인생의 꽃봉오리였던 것이다.
---「109쪽, 동은, ‘꽃’」중에서
저 먼 곳의 정토나 극락이 아닌, 지금 이곳에서 우리 주위의 부처를 자비와 친절로 대한다면 그곳이 바로 불국정토가 아닐는지. 너와 나, 우리 모두가 부처이자 보살이고 선지식이며 더불어 함께 살아갈 길벗(도반)이 아닌가 싶다.
---「115쪽, 진광, ‘출퇴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