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가 다르게 상상됨에 따라서 신학적 세계도 스스로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새로운 그리스도가 등장할 때마다 신학적 구성은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고, 이전에는 변화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 더 포용적이고 창의적인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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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찾고 있는 급진적인 삶, 즉 우리가 입는 피부는 신성한 육체를 입고 영광을 누리는 성육신한 몸으로 구체화된 여성, 자신이 발견한 피부 속에서 행복하며 창조적인 여성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결국에는 그들이 살아가는 신적인 현실은 바로 이 피부이다. 성육신은 우리의 몸이 우리의 집, 즉 신성한/인간이 원하는 거처라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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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것의 정치학은 다른 어떤 문제만큼이나 중요하다. 그것은 신학적인 주제이다. 다른 모든 인간 활동과 마찬가지로 먹는 것 역시 성육신의 문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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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신체 사이즈에 대한 페미니스트 신학적 문제는 문화와 패션만으로 쉽게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여성이 자신의 몸의 터전인 집에서 쫓겨나 자기와의 싸움에 놓이게 된 방식에 대한 진지하고 진심 어린 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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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우리 자신의 몸의 힘으로부터 소외되었으며, 사이즈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규제는 이러한 소외가 우리에게 행해지는 한 가지 방식이었다.
--- p.50
거식증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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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성육신은 몸 안에서 그리고 몸을 통해 정의가 실현될 것을 요구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성육신은 여성과 남성의 몸이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번성할 수 있기를 요구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치적 행동은 안수만큼이나 치유력이 있다. 실제로, 우리를 무력하게 하고 우리 자신의 삶에서 단순한 구경꾼으로 만드는 ‘분배된 치유’와는 달리, 상호성의 성장을 돕는 것은 공동체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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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이 우리가 아름답고 멋지게 만들어졌다고 선언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찾으면, 가부장제의 한 기둥에 금이 가고 무너져 우리는 신적/인간적인 충만함을 더욱 포용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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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는 진정으로 유능한 사람은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고 상호의존을 넘어선다는 신화를 영속화하지만, 장애인 모델은 이에 도전하고 우리를 인간답게 돌려놓는다. 무엇보다도 장애인 그리스도는 ‘질서정연한 대인관계 및 구조적 관계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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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실질적인 과제는 말하기를 통해 주체성(subjectivity)을 확립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자신을 변형하거나 상대적인 존재로 만드는 말의 패턴을 벗어날 수 있다.
--- p.172
언어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세상과 신학에서 어떻게 인식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 p.173
언어가 우리의 삶의 현실에 의해 형성될 때, 그것은 또한 우리가 ‘서로의 말을 들을 수 있게’ 해주며, 가부장제 아래에서 여성으로 구현되는 것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에 대한 침묵, 즉 죽음의 공백을 뚫고 나갈 수 있는 길이다. 우리는 타인의 말에 의해 우리의 몸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보았으므로 이제 우리의 말로 우리의 몸을 형성하기 시작해야 한다.
--- p.173
여성의 몸은 우리의 첫 번째 집, 측정할 수 없는 신비에 대한 우리의 첫 번째 지식, 우리를 스스로 버리는 무고한 고통의 첫 번째 원인.
--- p.180
우리가 새로운 존재 방식을 창조하려면 욕망에 대해 진실을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이를 통해 세상에서 여성이 되는 강력한 방식을 구현할 수 있다.
--- p.189
여성은 타인에게서 욕망 받고자 하는 욕구를 자신의 욕망을 수용하는 것으로 전환해야 한다.
--- p.192
언어부터 양육 방식과 가장 친밀한 순간에 관계를 맺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욕망을 되찾는 데는 많은 부분이 있다. 권력, 성별, 신체 크기는 모두 여성과 관련된 문제며, 떠오르는 뚱뚱한 예수의 일부인 관능적인 그리스도는 이러한 모든 측면을 권한이 부여된 성육신적 반란에 통합하는 한 걸음이다.
--- p.203
우리는 자신의 아름다움, 힘, 욕망을 선언하고 ‘여성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몸이 자기 수용을 표현할 때, 즉 자신의 내면에서 완전히 의식적인 창조적 투쟁의 조화 또는 상태를 표현할 때 먼저 존재한다’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 p.203
우리의 관능적인 힘을 일깨우는 것은 우리의 가장 깊은 열정과 연결되는 것. 그 힘은 통제와 지배가 아닌 관계를 통해 강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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뚱뚱한 예수는 우리가 음식에 대한 욕망을 통제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풍성함을 통해 풍요로워진 삶을 축하하고 세상을 향한 열망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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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열정적인 식사를 통해 자신의 욕망과 힘의 감각과 다시 연결될 여성들에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을 때 우리는 이 뚱뚱한 예수가 우리를 얼마나 혁명적으로 부르고 있는지 이해하기 시작한다.
--- p.222
먹는 것과 음식은 항상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었으며, 우리의 가장 깊은 가치를 표현하는 것이다. “먹는 것은 우리가 누구인지 상기시켜주는 영적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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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따르는 우리는 우리의 자유롭고 온전한 신체구현이 충만한 성육신을 노래할 수 있도록 우리의 가장 깊은 열정과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감각적 혁명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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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이지만 우리 몸으로 돌아가는 여정이며, 신성한 성육신을 품고 있는 이 텅 빈 육체에 다시 한번 거주할 수 있는 장소로 돌아가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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