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9. 10. 31
펜시어, ‘우리’는 발전소 폭발의 아픔에서 기원한 거나 다름없는 사람들이잖아. 발전소 폭발로 목숨을 잃거나, 평생의 보금자리가 산산조각나고, 자의로든 타의로든 가족들의 손을 놓고 흩어졌던 수많은 이들을 떠올려 봐. 보육센터는 나의 집이고, 센터 선생님들이 나의 부모님이고, 우리 그룹 애들이 내 형제자매들인 것과는 별개로, 어떤 질문이 마음속에 떠오르는 건 떨칠 수가 없더라. ‘그 많은 사람 속에 나의 기원이 되는 사람도 있었겠지?’ 하는 질문.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 말을 꺼내는 게 쉽지 않았어.
그래서 너만 조용히 읽을 수 있도록 글로 남기기로 한 거야. 정말로 많은 아이들이 혼자가 되었어.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참담한 심정이 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발전소 인근 지역들은 한동안 무법지대가 되어버렸지. 각종 불법 인체 시술을 하는 업체들에게, 혼자가 된 애들만큼 좋은 먹잇감이 없었을 거야.
난 운 좋게 정말 어릴 때 시술 업체에서 구출될 수 있었어. 그래서 나쁜 기억은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거울을 볼 때마다 내 몸에서 지워지지 않을 그곳에서의 흔적을 대면해야 해. 불법 홍채 미용시술을 위한 실험물로 사용되면서 얻은 아주 부자연스러운 색깔의 눈동자 말이야. 사정을 깊이 모르는 사람들은 근사한 색이라고 칭찬해줄 때도 있어. 칭찬에 담긴 호의는 언제나 고맙지. 기껍고. 내 눈을 볼 때마다 끔찍한 기억이 떠올라서 괴롭다거나 하지도 않아. 그런 것들이랑 별개로, 이건 내가 담고 살아가야 하는 복잡한 감정의 덩어리야. 고통도 쓸쓸함도 적절한 단어가 아니라서, 덩어리라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네.
--- pp.10-11
추신 : 와, 편지를 쓴다면 언제나 이 ‘추신’을 꼭 써보고 싶었어.
어쨌거나 빠트린 얘기가 있어서 추가해. 내 옆방 양쪽에는 자한이라는 동갑내기 친구와 식물학자인 율리안나 누나가 살게 될 거래.
잠깐 홀로행아웃으로 대화해본 게 전부이긴 하지만, 다들 좋은 사람들 같아 보여.
테멜다
--- p.16
2079. 11. 3
애초부터 난 오염된 금지구역을 복원하는 프로젝트에 민간인 지원을 받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가. 그리고 그런 곳에 자원해서 입주하는 너는 더 이해가 안 되고. 네가 그런 오지에 가 있으니까 홀로행아웃도 안 되고, 통화도 안 되고, 뭣도 안 되고……
팔자에도 없는 편지를 써야 하잖아. 네 편지의 홀로그램 스캔본만 받을 수 있는 것도 웃겨. 통신 제한 규정이 말도 안 되게 엄하네.
네가 미르 구역에 있는 덕분에 내 글씨가 얼마나 심각한지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있다. 네가 말한 그 편지쓰기의 낭만이라는 게 이런 거야? 엉망진창인 글씨체를 내 눈으로 확인하는 거?
어쨌든, 거기서 잘 지내고. 하루빨리 돌아오길 바라. 우리가 공식적으로 보육센터 소속인 것도 내년이 마지막이니까.
펜시어가
--- pp.19-20
2080. 3. 11
멜에게
너한테 보낸 편지에서는 최대한 여상스럽게 내 프로젝트 주제에 대해서 설명했지만, 사실 그걸 주제로 결정한 건 내 심장을 꺼내서 낱낱이 전시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어. 같은 팀이 된 애들이 깊이 의미를 읽어내지 못할 거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지.
그 애들은 한껏 해봐야 너와 내가 센터 출신이라는 점만 파악할 수 있을걸. 실상 우린 센터 출신이라는 것 이상으로 이 문제에 얽혀 있잖아. 너도나도 불법 미용시술 업체에서 빠져나왔으니까. 게다가 넌 나랑 다르게, 거울에 비친 눈동자를 볼 때마다 네가 그곳에 있었다는 증거를 확인하고 말이야.
--- p.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