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봄 들녘에 꾸역꾸역 돋는 잎새
가만히 눈 여겨 보라 그게 어디 기쁨인지
모질게 얼었던 땅 위 번져 가는 눈물이지
눈물 번지는 자리 하나 둘 꽃이 피어
그 꽃잎 아이들 불러 지난 얘기하노라면
수없던 울음의 기억 아지랑이 피우나니
_봄이 되면 잎새를 “가만히 눈 여겨” 봐야겠네요. 연한 연둣빛에 감동하고 기뻐하기 전에, 그 안에 스며 있는 눈물을 헤아려 봐야겠네요. 겨우내 “모질게 얼었던 땅 위”에서 어떻게 견뎌냈는지,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타자의 눈물에 공감하는 행위는 내게도 눈물이 번지는 일이에요. 그렇게 눈물이 번지는 자리에 비로소 “하나 둘 꽃이 피어”나지요. 화자는 아이들을 부르고 꽃잎을 보며 지나간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요. 이야기는 어떤 내용일까요? 화자와 아이들의 개인적인 담화일 수도 있고요, 개인을 벗어나면, 우리 사회나 역사에 대한 얘기까지도 가능하겠어요. 그 모든 이야기에는 “수없던 울음의 기억”이 담겨있지요. 함께 모여서 기억하고 얘기를 나눈다는 것은 또 하나의 따뜻한 위로와 연대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낭만일 거예요.
문학으로 소통하는 것도 이와 같아요. 문학 작품은 “눈물 번지는 자리”에 핀 한 송이의 꽃과 같죠. 꽃잎 하나하나를 보듯이 글자를 보듬어 읽으며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거예요. 문학 작품 속에는 작가와 작중 인물이 숨겨둔 수많은 울음이 있잖아요?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던졌던 수많은 질문과 고민, 결핍과 좌절에서 오는 상처가 언어 속에 녹아 있어요. 기록은 기억을 만들지요. 기억은 지난날에 대한 반추예요. 우리가 꿈꾸고 있는 이상적인 세계로 한 발 내딛기 위해 길 위에 서는 것이죠. 시조도 그 길 위에 함께 있어요. 아주 오래전부터 거친 길을 걸으며 지난날을 되새기며 미래를 기약하지요. 강인순의 「눈물」처럼요. 자, 여기 꽃이 된 시조 한 잎, 함께 하시지요! (문학의 이해를 위해 여전히 고군분투 중인 김태경)
---「눈물_강인순」중에서
사랑은 스무날에 한 번씩 왔다가 갔다
마야달력은 18월 뒤에 닷새를 추가했다
남겨둔, 허기로 굶는 날
너라는 울鬱 속에 있다
_사랑이 주기를 가질 때, 그 끝자락 이별의 다음 단계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레고리의 달력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그 불완전함과 서글픔과 애처로움을 시인 염창권은 마야 달력을 통해 그려냅니다. 마야의 달력은 인류 역사상 가장 과학적이라고 평가받는 달력입니다. 20진법을 통해 계산한 지구의 공전주기를 그들은 20일간 18개월의 달과 그다음 5일이라는 ‘우아옙’으로 나타내는데, 이 여분의 닷새는 19번째의 달로 일관되기도 합니다. 19월, 아홉수는 흔히 가장 불결하고 위태로운 숫자라고 일컬어지는데 이는 가장 완벽한 10이 되기 직전의 미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18월 이후의 19월 우아옙은 이처럼 1년의 완성을 위한 조각이며 다음 새로운 해의 바로 직전 위태로운 시기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완벽하게 딱 떨어지는 스무날에 한 번씩, 완전한 달에 한 번 잠깐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열여덟 번째의 사랑에, 화자는 그 사랑의 여분으로 남은 닷새를 살아갑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 자리에, 그는 여분도 없는 공백, 즉 허기로 굶어가야 합니다. 이별의 마지막에는 무엇도 남아 있지 않았지요. 이렇듯 지나간 사랑에 대해 닷새 동안 ‘너라는 울鬱’로만 버텨야 함에, 스스로를 고통에 가둠으로써 다음에 올 완벽한 날들을 염원합니다.
시인은 잃어버린 사랑과 시간을 원망하거나 후회하지 않고, 남아있는 자신과 ‘울’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시간이 지나 자연스레 열아홉 번째의 달이 오는 것처럼, 자신을 찾아온 사랑 다음을 고스란히 음미하는 것이지요. ‘존재함’뿐 아니라 ‘존재하지 않음’을 담아내는 이 시는 연민과 공감을 통해 외곽과 주변을 성찰하려는 염창권 시인의 세계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가장 쓸쓸하고 위태로운 고통의 순간을 정형시의 틀을 통해 절제된 감정으로 표현하는 것, 더하여 약간의 ‘자유시스러움’을 첨가해 깊은 여운을 주는 것도 이 시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화콘텐츠문화경영학과 20학번 김서연)
---「18월_염창권」중에서
허름한 호텔방에서 창문은 닫지 않고
어제까지 여름이었지 혼자 누울 침대를 본다
마음은 돌아오지 못하게 문 잠그고 불 끄고
한입 베어 문 마카롱 혀 굴리며 떠올려 본다
입가에 묻은 소녀 웃음과 입술 주름 세어본다
대견한 슬픔이 오고 있다 선물이라 들었다
_화자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공간, 혼자 있는 허름한 호텔방. 삭막합니다. 기억 속 아픈 뼈를 때리는 슬픔의 추억이 왁자지껄 몰려오기 아주 좋은 조건입니다. 나가라고 창문을 열었는데 도리어 슬픔이 더 들어올 것 같습니다. 깜빡이 안 켜고 눈치 없이 훅 들어오는 미련이라는 미련한 친구가 몰려올까 봐 문도 잠그고 불 끄면서 마음이랑 사회적 거리두기 철저하게 해 봅니다. 1차 방어선 설치 완료했지만 그래도 화자는 안심이 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미련이라는 마음이 더욱 독한 마음을 품은 독화살이 되어 1차 방어선을 뚫고 올 것 같아 이번에는 마지노선으로 마카롱이라는 진통제 한 입을 베어 먹습니다. 달콤함이 입부터 뇌 속 뉴런 하나하나까지 꽉 채우는 마카롱. 아쉽게도 신체적 감각은 꽉 채워주는데 공허한 마음은 채워주지 못합니다. 1차 방어선, 마카롱이 깔아준 마지노선을 다 뚫어버린 슬픔이 자길 왜 막았냐며 분노와 독기를 완충해서 공허한 마음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이 거대한 슬픔을 대견한 선물이라 하는 화자. 이전까지의 행동은 슬픔을 일으키기 위한 빌드업일지도 모릅니다.
슬픔을 잊기 위해 하는 행동은 뒤집어서 보면 슬픔을 불러오기에도 안성맞춤인 행동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불러온 슬픔은 마음과 기억을 아프게 하지만 이 아픔의 과정은 미련이라는 미련한 감정을 버리고 앞으로 나아가며 이전의 생각을 성찰하고 이미 곪아버린 마음의 염증을 치료하는 쓰린 고약이 되기도 합니다. 필자는 물론이거니와 대다수가 그 슬픔이 아파 피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 슬픔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필자는 아직도 마카롱 속에 있는 달콤 쌉싸름한 맛이 두려워 먹지 못하는데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선물이라 받아들이며 발상의 전환을 한 시인. 그 발상의 기저 속에 있는 마음과 생각의 깊이를 이루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천 길 물속보다도 알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고 깊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시인은 그 깊은 마음에서 마카롱을 먹고 한 발 더 깊숙이 내려갔습니다. 시인이 깊고 어두운 마음을 밝히는 선발대가 되었으니 독자는 그 위풍당당한 선발대를 따르는 힘찬 본대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로 이 시는 마리아나 해구보다도 깊고 어두운 사람의 마음이라는 심해 속 해구를 더욱 깊숙이 탐험하고 밝혀주는 ‘노틸러스호’ 같습니다. (사학과 18학번 이대현)
---「마카롱macaron_김남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