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건국은 서양 기독교 문명 세계가 낳은 유대인 문제의 파생품이다. 서양 기독교 문명이 성립된 뒤 계속된 차별과 배제의 상징인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전후 이스라엘 건국으로 귀결됐다. 이스라엘 건국은 박해받은 유대인이라는 ‘민족’ 혹은 ‘집단’의 자구책이겠으나, 이는 팔레스타인 주민이라는 ‘민족’ 혹은 ‘집단’에 대한 또 다른 차별과 배제를 낳았다. 유대인은 자신들의 이스라엘 건국 정당성을 찾으려다가, 자신들을 박해한 나치 독일의 인종주의와 민족주의를 닮아갔다. 차별과 배제, 박해를 당한 유대인이 자신들의 고난과는 아무 상관이 없던 다른 집단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방식으로 자구책을 찾았다는 게 현대 세계에서 유대인과 이스라엘 문제의 본질이자 모순이다. 이를 유대인들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유대인 문제는 서양 기독교 문명이 만들었고, 현대 이스라엘 문제 역시 영국·미국 등 기독교 문명에 입각한 패권국가가 만든 국제질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 p.5
유대인 문제는 기독교 세계가 자신들의 정체성 확보를 위해 타자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우리’라는 개념은 ‘저들’이 있어야 성립한다. 뚜렷한 영토적 경계도 없이 여러 언어가 뒤섞여 존재하는 유럽의 주민들에게 자신들과 구별되는 가장 가까운 타자는 그들과 뒤섞여 살고 있던 유대인이었다. 차별과 배제는 ‘우리’와 ‘저들’을 가르는 수단이다. … 기독교도는 유대인을 창조했고,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인을 창조했다. 한국 사회에는 지금 ‘우리’와 ‘저들’의 구분이 없는가?
--- p.17~18
추방, 유배, 유랑, 이산, 박해, 귀환…. 유대인과 그 역사 담론을 관통하는 상징어들이다. 유대인은 로마 정복자들에 의해 팔레스타인 땅에서 추방돼, 낯선 땅으로 유배되어, 전 세계를 유랑해, 뿔뿔이 이산돼, 현지에서 박해를 받다가, 결국 팔레스타인 땅으로 귀환해 이스라엘을 건국했다는 것이 유대인과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 내러티브이다. 과연 유대인은 고향 팔레스타인 땅에서 완전히 뿌리 뽑히고 후손들이 2천 년간 낯선 땅들로 이산했음에도 그 혈맥이 면면히 이어지다가 팔레스타인 땅으로 귀환한 것일까? 이는 유대인 문제와 역사 담론의 핵심이지만, 역사적 사실로 객관화하는 작업은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회피되어왔다. 이를 그저 당연시했을 뿐이다.
--- p.84
유대인=고리대금업이라는 등식과 이미지는 어쨌든 근대로 갈수록 유대인의 정체성과 박해로 이어지는 중요한 요인이 됐다. 이는 과연 기독교 세계가 유대인에게 강제한 것이고, 유대인은 단순히 기독교 세계의 강제로 ‘기생충’이 되어서 박해를 받은 피해자일 뿐인가? 유대인 문제에서 중요한 이 사안은 기원 이후 유럽과 중근동의 역사 속에서 생존하려는 유대교 공동체의 대응이라는 관점에서도 살펴야 한다. 유대인이 중세 시대 때 봉건체제의 주산업인 농업에 종사하지 않고, 금융업이나 상업 등 중계적인 직역에 종사하게 된 것은 기독교 세계의 배제와 차별의 결과도 있지만, 유럽과 중근동의 역사 속에서 유대교 공동체가 진화한 결과라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 p.141
기독교도에게 유대인은 타자였으나, 내부의 타자였다. 유대인이 기독교 세계에 살고 있기도 했고, 기독교 서사의 역사적 증거물인 구약의 백성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성서에서 말하는 대로 여전히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 ‘특별한 백성’으로 남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섭리를 드러내는 선택된 백성이기는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저주받고 비천한 상태에 처하고, 예수의 재림과 함께 그들도 해방되는 역할로 신의 섭리를 드러내는 선택된 백성이었다.
--- p.142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박해는 그들에 대한 기독교 세계 주민들의 양가감정으로 촉발된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보다 비천한 존재여야 하는데, 세속 세계에서는 자신들이 아쉬워해야 하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멸시와 열패감이라는 양가감정이었다. 이는 유대인이 기독교 봉건 세계에서 농노 등 주민들을 상대로 세금을 징수하거나, 재산을 관리하면서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연결하는 중간숙주 계급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주 등 지배계급에게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일구고 관리하는 데 필요한 존재였다. 하지만 동시에, 비천한 지위에 있어야 하는 혐오스러워야 할 존재였다. 이는 필요하면 유대인의 재산을 빼앗는 명분이 됐기 때문이다. 주민들에게도 유대인은 영주를 대신해 세금을 징수하는 대리인이거나, 돈을 빌려주는 대금업자였다. 유대인은 고혈을 빨아가는 착취자로 각인될 수밖에 없었다.
--- p.157
유덴가세 게토를 둘러싼 담장에 그려진 벽화는 이곳에 사는 주민들이 감옥의 죄수만도 못한 존재임을 말해준다. 벽화에는 암퇘지를 둘러싼 유대인 세 명이 그려져 있다. 한 명은 돼지의 젖을 빨고, 유대교 성직자인 랍비 복장을 한 또 다른 한 명은 돼지의 꼬리를 들어주고 있으며, 다른 한 명은 돼지 오줌을 받아먹고 있다. … 주변 지역의 성직자와 직업조합인 길드의 요청에 따라서, 게토의 유대인에게는 오직 기독교도 주민들이 경멸하는 직업만 허용됐다. 서부와 중부 유럽의 유대인 중 4분의 3은 노점상과 행상, 거리의 대금업에 종사했다. 일부 유대인은 작은 가게를 차리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그렇지 못했다. 거지, 칼잡이, 뚜쟁이, 심지어 도둑 등의 상당수가 유대인이었다. 이는 유대인은 비천하고 비열하다는 기독교도의 편견을 강화했고, 다시 유대인을 박해하는 악순환을 만들었다.
--- p.164~166
이런 지독한 차별과 천시도 당시의 시대적 맥락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유대인은 도시의 기독교도 주민보다는 권리가 적었지만, 당시 유럽의 농촌 대중보다는 의무도 적었고 혜택을 누렸다. … 유대인들이 해가 뜨면 게토에서 나와 주변 마을을 돌아다니다 해가 지면 게토에 다시 갇혔다면, 농촌 주민들은 해가 뜨면 가축 우리 같은 집에서 나와 농토에서 묶여 일하다 해가 지면 그 가축 우리로 돌아와 갇혀 지냈을 뿐이다. … 유럽의 농민이 왕이나 영주에게 징집되어 생업을 박탈당하고 목숨을 잃는 동안 유대인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세상의 변화를 깨닫고 그에 맞춰 변신을 할 수 있었다. ‘유럽의 기독교 봉건 세계는 유대인을 배제하는 차별을 했으나, 이는 사실 유대인을 그 속박에서 해방시켰다’는 유대 역사학자 맥스 디몬트의 지적은 유대인의 역사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 p.167~168
유럽에서 교역과 제조업이 발흥하면서 전통적인 직업조합인 길드의 영역을 넘어서자, 유럽 각국 절대 왕정의 중상주의는 국제적인 거래를 감당할 수 있는 이들이 필요했다. 특히 수많은 전쟁을 치른 유럽 각국의 절대주의 왕정에는 군수품 조달이 중요한 과제였다. 군수품 조달자는 거의 예외 없이 유대인이었다. 유럽 각국뿐 아니라 신대륙과 중동에 흩어진 유대인 사업가들은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그 재정을 조달하는 광범위한 경험과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유대인 상인들은 17세기 전반부에 유럽 중앙에서 벌어진 30년전쟁 와중에 교전 당사자들의 자산을 인수하거나 팔면서 부를 축적해 그 기반을 닦았다.
--- p.175
열등한 종 가운데에서, 독일 우생학자들이 게르만족 혈통에 대한 명확하고 유일한 위협으로 지목한 것이 유대인이었다. 유대인이 게르만족 사이에 섞여 있기 때문이었다. 우생학자 카를 스트라츠Carl Stratz는 “유럽 유대인들은 주변의 다른 민족들보다 장애인 비율이 가장 높다”며 유대인들이 안짱다리, 평발, 곱사등, 새가슴,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경쇠약 등 다양한 유전적 질병에 시달린다고 주장했다. 독일 우생학은 유대인의 이런 생리적 특성을 그들의 사회적 행태와 연관시켰다. …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유대인은 이제 종교적 신념이 문제가 아니라 인종적 유전에 문제가 있는 존재로 바뀌게 된다. 타락한 인종인 유대인은 타락한 행태를 보일 수밖에 없다는 근대의 반유대주의는 이렇게 완성됐다. 19세기 중반 이후 자본주의 전개가 부르는 다양한 사회경제적 위기는 반유대주의와 결합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박해로 귀결되어갔다.
--- p.224~225
밸푸어 선언에서 “팔레스타인의 기존 비유대인 공동체들의 시민적, 종교적 권리를 (…) 손상시킬 수 있는 일이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표현은 향후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질 갈등과 대립을 예고했다. 이는 서구 기독교 세계가 만들어낸 유대인 문제를 중동으로 수출하는 것이었다. … 밸푸어 선언은 지금은 익숙해진 ‘ 2천 년 동안 계속된 아랍 민족 대 유대 민족의 대립’이라는 표현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랍 대 유대 민족의 대립’이라는 개념은 기껏해야 20세기 이후 성립된 것이다. 중동에서 팔레스타인 분쟁은 이렇게 서구의 기독교 세계가 유대인 문제를 이슬람권에 수출함으로써 기원했다. 서구의 유대인 문제에서 피해자이자 약자는 유대인이었는데, 중동으로 수출된 유대인 문제에서 가해자이자 강자는 유대인이었다.
--- p.312~314
팔레스타인 현지 주민과 유대인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유대인 입식의 필연적 결과물이었다. 팔레스타인 주민들도 이방에서 온 유대인이 그 땅에서 새로운 집단으로 출현하자 그에 맞서는 정체성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서 국민국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으로 가속화되자, 이로 인해 소외되고 배제되는 팔레스타인 주민들 역시 타자화된 정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유대인의 도래는 팔레스타인 주민에게 자신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살던 아랍 주민’에서 ‘팔레스타인인’으로서 인식하게 하고, 더 나아가 ‘팔레스타인 민족’으로서 여기게 했다. 팔레스타인 주민을 본격적으로 그 땅에서 내몰아 난민으로 만든 이스라엘 건국은 팔레스타인 주민의 대항적 민족화를 더욱 재촉하게 됨은 물론이다.
--- p.334~335
건국 이후의 이스라엘은 생존이 급선무였다. 주변의 아랍 국가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 우선시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은 1973년까지 아랍국가들과 벌인 4차례의 중동전쟁이었다. 이스라엘은 4차례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했다. … 이집트 등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무력으로 제거하는 일은 불가능하기에 공존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이스라엘과의 협상에 들어갔다. 1973년 이스라엘-아랍의 마지막 중동전쟁이 끝나고 협상이 시작되면서, 이스라엘의 내부도 변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도 주변 아랍 국가 및 팔레스타인과 협상에 나서야 했다. 이는 양보를 의미했다. 양보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내부의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였다. 이스라엘이 생존의 위험에서 벗어나고 양보를 할 때가 오자, 건국 때의 이상과 이념보다는 국내 세력들의 이해관계가 국내외 정책을 좌우하게 됐다. 협상에 따른 양보를 반대하는 보수우파 정당인 리쿠드당이 4차 중동전쟁 전후로 창당돼, 나중에 이스라엘 정치를 주도하게 된다.
--- p.402~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