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허무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 허무한 사람이다. 남들의 평판과 오락, 장래에 관한 생각에 빠진 젊은이들 말고, 이 허무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이들에게서 오락을 금지해보라, 권태로 시들어가는 그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때 그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공허를 느끼게 될 것이다. 자신을 직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서 결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 없게 될 때, 견디기 힘든 슬픔에 빠지게 되며, 이는 몹시 불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 p.42
사소한 것이 우리를 위로하는 것처럼, 또한 사소한 것이 우리에게 상처가 된다.
--- p.44
“무슨 소리요, 당신은 강 건너편에 살고 있지 않소? 이보시오, 당신이 강 이쪽에 살고 있다면 나는 살인자가 될 것이고 당신을 죽이는 것은 부당한 일일 것이오. 하지만 당신이 강 저편에 사는 이상, 나는 용사가 되고, 내 행동은 정당하오.”
--- p.55
나는 손이나 발, 머리가 없는 사람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물론, 우리는 경험으로 머리가 발보다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생각하지 않는 인간은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은 차라리 돌이나 짐승일 테니까.
--- p.100
인간의 위대함은 자신이 비참하다는 사실을 안다는 데 있다. 나무는 자기 비참함을 알지 못한다. 분명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그러나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인식 그 자체는 위대한 것이다.
--- p.100~101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지위는 두말할 필요 없이 왕위다. […] 그런데 만일 그가 오락 거리라고는 하나도 없이 지내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하게 된다면 이 밋밋한 행복은 그의 삶의 원동력이 되어 주지 못할 것이 뻔해서 그는 결국 언제 일어날지 모를 반란, 결국 피할 수 없는 병고와 죽음 등 자신을 위협하는 모든 것들에 필연적으로 직면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왕에게 소위 오락이라는 것이 없다면 그는 결국 불행해질 것이며, 심지어 언제든 기분전환을 하고 오락을 즐길 수 있는 말단 신하보다도 더 불행할 것이다.
(인간의 유일한 행복은 자신의 근본 조건을 생각하는 것에서 마음을 돌리는 데 있다. 이 문제에 골몰하지 못하도록 어떤 직업이라든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신나고 새로운 열정의 대상, 도박, 사냥, 인기 있는 공연물, 한 마디로 오락이라 부르는 것에 매달린다.)
[…] 사실 왕의 지위에서 누리는 행복의 가장 중요한 핵심도 끝없이 그의 기분을 전환해주고 온갖 종류의 쾌락을 제공하는 것에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왕 주변에는 왕이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에서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는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비록 왕이라 해도 자신에 관해 생각하면 불행해지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 고안해 낼 수 있었던 모든 것이다. 이점에 대하여 철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굳이 돈을 주고서는 사지도 않을 토끼를 사냥하기 위해 온종일 쫓아다니는 것을 분별없는 행동으로 여긴다면, 그들은 우리의 본성을 잘 모르는 것이다.
--- p.123~125
인생 가운데 일주일을 바칠 수 있다면, 백 년까지라도 바칠 수 있다.
--- p.162
하지만 당신은 내기를 해야 한다. 당신 의지와 상관없이, 이미 문제의 배에 올라탄 사람처럼 당신은 이미 내기에 뛰어든 것이다. 그러니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어차피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쪽이 당신에게 손실이 클지 따져보자. 당신이 잃을 수도 있는 두 가지는 진실과 선이다. 그리고 내기에 걸어야 할 두 가지는 당신의 이성과 의지, 곧 당신의 지식과 행복이다. 당신이 본성적으로 피하려고 하는 두 가지는 오류와 비참이다. 선택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없으므로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고 해서 이성적으로 문제 될 것은 없다. 이로써 한 가지 문제는 해결되었다. 하지만 당신의 영원한 행복 문제는? 신이 존재한다는 쪽인 동전 앞면을 선택했을 때, 손익을 따져보자. 다음 두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기면 전부를 얻고 지더라도 잃을 것이 없다. 그렇다면 망설이지 말고 신이 존재한다는 쪽에 걸라. ―“오, 정말 그러네요. 그럼, 그쪽에 걸어야겠군요. 그런데 내가 너무 많은 것을 거는 건 아닌지….” ―자, 봅시다. 손익의 운이 같으니까, 하나의 삶으로 두 개의 삶을 얻을 수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걸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세 개의 삶을 얻을 수 있는 내기라면?
--- p.356~3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