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1929년, 쇼와 4년은 에드가 오가 경성에 복귀한 해였다. 그가 동경 생활을 마무리 짓고 부산항을 통해 조선으로 돌아온 뒤, 기차에서 내려 경성역에 발을 디딘 것은 1928년 12월 29일이었다. 사흘의 시간은 적당히 가감할 수 있을 터, 그의 경성 복귀를 1929년이라고 해도 무리는 없었다. (중략)“아직 이 나라는 그리 모던한 것 같지 않은데.”에드가 오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자기 입에서 나온 말에 그가 가장 먼저 깜짝 놀라서 숨을 삼켰다.야만이 끝나고 이제는 온 세상이 이성과 지성으로 가득 차리라는 신문의 희망 가득한 전망은 단지 말뿐인 공허한 수작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에드가 오는 모던을 숭상하고 이성과 합리의 세상이 앞으로 펼쳐질 거라고 주장하던 사람이었다. 모던하지 않다는 불평은, 에드가 오를 잘 아는 이가 들었다면 그가 내뱉었다고는 도저히 믿지 못할 말이었다. 이미 심사는 그때부터 단단히 틀어져 있었던 게 분명했다. --- p.13~14
둘레가 한 아름은 가볍게 넘을 커다란 나무 한 그루 뒤에 집 한 채가 서 있었다. 수려하고 화사한 서양풍 집이었다. 2층 높이인 집의 가장 위에는 세모로 빳빳하게 각이 진 붉은 지붕이 얹혀 있었고 하얀 페인트로 칠해진 벽과 붉은 칠이 된 문은 깔끔하고 산뜻한 느낌이었다. 경성에 사는 부자들의 별장이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그리고 내지에서도 부자들이나 살고 있을 법한 최신식 문화주택이었다. (중략) “아.”그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우울했던 기분이 한순간에 날아갔다. 어쩌면 이건 운명과도 같은 만남이었다. 경성의 누구보다도 모던하다고 자부하는 에드가 오의 눈앞에 그야말로 모던의 이상향이 서 있었다. 눈앞의 집, 은일당은 그의 모던 취향에 딱 들어맞았다.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 꿈꾸는, 문화주택을 별장 삼아 여유를 누리는 삶의 표본으로 나올 법한, 그야말로 이상적인 곳이었다. --- p.17~18
권삼호는 온갖 물건이 엉망으로 널브러져 있는 방 한쪽에 펼쳐진 요 위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하지만 그는 코를 골지도, 잠꼬대하지도 않았다. 그저 눈을 부릅뜬 채 천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방 안에서 곧장 눈에 띈 것은 두 가지였다. 바닥과 벽과 천장으로 가득 흩뿌려진 피와 권삼호의 목에 박힌 물건이었다. 권삼호의 목에 박힌 것은 기다란 나무 자루를 달고 있었다. 장작을 패거나 땔감을 손질하는 데 쓸법한 모양새의 물건. 도끼였다. 시커먼 도끼날 옆으로 검붉은 피가 흥건히 넘쳐흘러 있었다. --- p. 89~90
경성에 뒤팽 같은 탐정이 있다면, 그 탐정에게 사건의 진상을 밝혀 달라 부탁할 수 있다면, 사건을 해결하고 내가 겪은 곤경과 굴욕 역시 도로 갚아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경성에는 뒤팽 같은 탐정이 없다. 있는 것은 순사뿐이다. 일본 경찰은 그들의 수사 능력이 세계 제일이라 자랑하지만 막상 그 실상은 무고한 사람을 범인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이 고작이다. 어쩌면 일본 경찰이 세계 제일인 것은 수사 능력이 아니라, 사람을 겁주고 윽박지르며 따귀를 때리고 고문하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 p.144
경성 땅에서 탐정이 되겠다고 결심하며 방을 나온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의 생각은 벌써 꽉 막혀버렸다. 소설에서는 탐정이 현장에 가기도 전에 신문 기사로 대강의 정보와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얻곤 하는데, 현실에서는 자극적인 소문 외에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 p.155~156
탐정이라는 칭호를 듣는 순간, 이름을 알 수 없는 감정이 그의 가슴을 간질였다. 시작부터 인정을 받은 것만 같은 기분에 민망하면서도 으쓱했다.문득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광경이 펼쳐졌다. 경성 한가운데, 은일당 같은 신식 가옥 앞에 달린 ‘에드가 알란 오 탐정사무소’라는 현판. 그 안에서 비서인 선화가 신문을 가져다주고, 충실한 심복이자 조수인 영돌 아범이 의뢰인을 안내하면, 탐정인 자신이 마치 셜록 홈스처럼 의뢰인의 정체를 그 자리에서 밝히며 놀라움을 주는 것이다. --- p.182
문득 에드가 오는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권삼호는 이부자리에서 죽어 있었다. 그의 시체를 보았을 때 에드가 오는 권삼호가 술기운에 그냥 곧장 자다가 죽은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었다. 허름한 저고리와 바지만을 입고 있는, 그가 늘 입는 옷차림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잿빛 두루마기는 어디에 있는가?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권삼호는 은일당에 왔을 때 늘 걸치고 다니는 잿빛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에드가 오의 방에 옷을 놔두고 가지 않은 건 확실했다. 하지만 방 안을 둘러봐도 권삼호의 두루마기는 보이지 않았다. 낡은 장롱을 열어보았지만, 거기에도 허름한 외투 하나가 걸려 있을 뿐, 잿빛 두루마기는 없었다. --- p.190
두 번째 사건 현장에 들어선 에드가 오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도저히 십여 분 남짓한 시간 동안 여기를 조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다다미가 깔린 작은 방 안에는 털외투, 책, 무언가를 담아둔 상자들, 저고리, 도자기, 탁자, 싸구려 양복, 자명종 시계, 장롱, 옥비녀, 장신구함 등의 물건이 아무런 질서조차 갖추지 않은 채,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사치와 비루함이 한 방 안에 두서없이 혼돈의 형상으로 섞여 있었다.이 방의 주인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이런 물건을 취미로 모으고 산 사람인가? 아니면 이 물건들 속에 무언가 의미를 두고 살아온 사람이란 말인가? 이 집은 사람이 주인인가, 이 물건들이 주인인가? --- p.204~205
에드가 오가 도착한 곳은 인사동이었다. 파고다 공원 근처의 인파를 헤치고 그는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의 볼일은 인사동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었다. 파고다 공원 근처에 난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을 굽이굽이 들어가면, 목적지인 헌책방 구문당이 불쑥 나왔다. 쌓인 책 때문에 너저분한 느낌을 주는 가게의 문 앞에는 흰 수염을 아무렇게 기른 조선 노인이 앉아 있었다. 칙칙하게 빛바랜 솜저고리와 솜바지를 두껍게 입고 있는 모습이 아직 남아 있는 잔 추위를 못 견디는 모양새였다. 노인은 화로를 앞에 두고 부지깽이로 그 속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 p.237
“경성은 모순으로 가득한 혼란스러운 곳입니다. 평범한 곳에 숨어 도사리고 있던 경성의 어둠이 언제 어떤 모양으로 변해 선생님께 덤벼들지도 모릅니다.”
“괴담 같은 이야기로군.”“더 무서운 건 그 어둠이라는 것이 사람 개개인에게 저마다 다른 모습을 하고 도사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센다 아카네에게는 센다 아카네의 어둠이, 에드가 알란 오 선생님에게는 에드가 알란 오 선생님의 어둠이 있는 것입니다. 그 어둠에 뒤덮여버리면 삶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맙니다. 육체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상 껍데기만 남은 것이나 다름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 p.299
방에 돌아온 에드가 오는 구겨진 모자를 솔질한 후 조심스레 상자에 넣고, 양복 상의와 조끼 역시 구겨지지 않게 벽에 건 뒤, 셔츠와 바지만 입은 차림으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중략) 문득 에드가 오는 박동주가 물건을 처분한 것이 단지 경찰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박동주 군의 신변을 위협하는 자들은 과연 경찰뿐일까? 어쩌면 박 군이 피하려는 것은 경찰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가 피하려는 것은, 실은 홍옥관의 추적 아닐까? 사건에 관련된 무언가를 알고 있기에? 어쩌면 박 군은 권삼호의 집에서 무언가를 보거나 들어버린 게 아닐까?
--- p.323~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