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둘 수 있을 때 어서 그만두세요. 그만두기에 늦었다면 나가서 뭐라도 찍으세요. 이 찬란한 디지털 시대에, 돈 없고 인맥 없어서 영화 못 만든다고 하면 누가 불쌍히 여겨 줄 것 같습니까? 그런 정신 상태라면 당장 그만두세요. 정 가난하다면 스마트폰 들고 밖에 나가서 낮에만 벌어지는 5분짜리 이야기 동영상이라도 만들어요. 그때는 조명이 필요 없으니까요. 그리고 미장센 단편영화제에 출품해요.” --- 「영화감독 박찬욱」 중에서
“카메라 앞에 설 수 있는 힘이 있고, 또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언제든지 달려가야죠. 현장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는 ‘행복한 배우’가 되는 게 제 꿈입니다. 물론 현장에 부담을 주진 않아야겠죠. 하하하. 후배들도 제가 언제까지 현역으로 현장을 지킬지 감시하겠답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행복한 배우, 맞죠?” --- 「영화배우 안성기」중에서
임 감독은 여전히 감독으로부터 시나리오를 건네받을 때가 가장 설렌다. 이번에는 또 어떤 작품일까? 감독이 원하는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빨리 현장에 나가 새로운 스태프와 어울려 식구처럼 정을 나누며 일하고, 그 결과물이 스크린에 비쳐지기를 고대하는 마음, 이것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운명이다. --- 「조명감독 임재영」중에서
“감독 수업했던 게 편집일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작품의뢰를 받으면 우선 감독과 함께 시나리오를 리뷰합니다.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인가, 또는 어떻게 찍을 것인가를 토의하죠.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장점과 단점을 짚고 넘어가면, 본 작업에서 편해지거든요. 찍어 온 필름에 대해서도 감독에게 찍은 이유를 하나하나 듣습니다. 그래야 시뮬레이션도 해 보고 편집의 가닥을 잡을 수 있으니까요.” --- 「편집기사 김상범」 중에서
“전 세계에서 아마도 나처럼 극장 간판 그리다가, 마케팅하고 영화제작하다가, 또 외화 수입하고 배급하다가 감독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영화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고, 체계적으로 감독 밑에 연출부로 들어가서 연출 경험을 쌓은 것도 아닌데 이렇게 영화감독 하고 있잖아요? 모두 주변 사람들 덕분이죠. 그들을 보면서 아, 죽어라 하지 않으면 개뿔도 없겠구나 깨달은 거죠.” --- 「영화감독 이준익」중에서
그녀가 바라보는 한국영화의 미래는? 맑음이다. 무엇보다도 한국영화를 만들어 내는 인력에 대한 믿음이 크다. 단순히 유학파라거나 학위를 가졌다거나 하는 수준이 아닌, ‘영화에 미쳐 사는’ 사람들의 열정이야말로 전 세계 최고라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 「프로듀서 김미희」중에서
그에겐 모든 인생이 길 위에 서 있는 여행자의 삶으로 비유된다. 목적지가 뚜렷한 길이 있는가 하면 지도를 지니지 못한 듯한 나그네의 길도 있다. 바로 그 길 위에서 다양한 사람이 만나고 관계를 맺어 가는 것, 또 갈등을 빚기도 하고 화해와 용서가 이루어지는 모습들을 영화로 만들어 냈다. --- 「영화감독 배창호」중에서
미술감독 제의를 받으면 무엇보다도 시나리오 분석에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다. 감독이 영화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해 내는 일이 프로덕션 디자인의 첫 번째 임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그것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표현해 낼 것인가를 연구한다. --- 「미술감독 김기철」중에서
조심스럽게 박중훈은 미래를 꿈꾼다. 한때는 배우가 연기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연기 잘하는 배우를 존경했고, 그를 닮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제는 오래도록 꾸준히 연기하는 배우를 닮고 싶어 한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관객과 호흡하는 게 훨씬 더 큰 가치가 있음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 「영화배우 박중훈」중에서
“가진 게 없는 우리가 영화로 살아남는 길은 콘텐츠밖에 없습니다. 막연한 환상을 깨야 합니다. 환경이 어쩌고저쩌고 불평 늘어놓을 여유가 없죠. 열정만으로도 부족합니다. 이거 아니면 죽는다, 이런 각오가 서 있어야 합니다.” --- 「영화배우 겸 프로듀서 조선묵」중에서
이 감독의 스타일이었다. 영화계에 처음 입문했을 때도, 또 조감독이 되었을 때도 늘 한 작품이 끝나면 어김없이 쉬었다. 일이 없어 쉬는 게 아니라, 일부러 그렇게 휴식을 가졌다. 그의 이력에서 조감독으로서 작업한 영화 두 편의 간격이 3년인 것도 다 이 때문이다. --- 「영화감독 이정향」중에서
이제껏 선보인 그의 영화음악에는 경계가 없다. 장르에 대한 구별도 당연히 없다. 과거와 현대를 넘나들기도 하고, 힙합과 클래식이 뒤섞이기도 한다. 음악과 영화에 흠뻑 빠져 살아온 어린 시절부터의 영향 탓이다. --- 「음악감독 조영욱」중에서
‘흥행복’을 타고 나지 못했다고 탓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더 이상 영화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영화는커녕 앞으로 먹고살아 갈 일도 막막했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생활비를 쓰게 되자 평소 낙천적이던 아내도 걱정스런 눈치였다. 늘 영화사로 출근하던 사람이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 「영화감독 김유진」중에서
“다른 사람들은 한 계단 한 계단 쉽게 올라가는 것 같은데, 왜 나는 이렇게 한 계단이 높고 험난할까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내가 자질이 없나, 그만둬야 하나 생각도 했고요. 그런데 이번에 배우로 인정해 주신 것 같아 정말 기분 좋고……, 이젠 다른 것 신경 쓰지 않고 어떻게 하면 연기 잘할 수 있을까에만 집중하겠습니다.” --- 「영화배우 서영희」중에서
공포영화와 스릴러 영화에서 보여 준 남 감독의 라이팅도 여러 영화인으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이런 장르 영화들에서 관습적으로 시도되는 푸른 빛이나 붉은 색감을 과감하게 배제하고, 빛과 어둠의 콘트라스트로 인물을 살려 내는 조명방식으로 ‘캐릭터가 살아 있는 공포영화’를 만들어 냈다는 호평을 들었다. --- 「조명감독 최성원ㆍ남진아」중에서
촬영감독의 스타일도 각양각색이지만 박 감독은 ‘공장장론’을 주장한다. 영화산업을 이끌어가는 게 현장이고, 이 현장에서 만들어 내는 상품이 영화라는 설명이다. 따라서 현장, 즉 공장의 기계가 멈춰 서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잘 준비된 스케줄 속에서 촬영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야 하는 게 그의 스타일이다. --- 「촬영감독 박희주」중에서
뉴욕대 유학시절, 그는 하마터면 졸업을 못할 뻔한 에피소드를 갖고 있다. 학과장 교수가 그의 졸업작품을 보다 말고 나가 버린 것이다.…면담을 끝내며 교수는 자신이 뉴욕대에 재직하는 동안 단 두 명의 학생과 면담을 가졌다고 밝혔다. 하나는 짐 자무쉬였고, 또 다른 하나는 ‘바로 너’라면서 “네 영화를 기대한다.”고 했다. --- 「영화감독 김용태」중에서
오동진은 바로 이러한 역할에 충실한 대표적인 영화평론가이다. 그의 영화에 대한 설명이나 비평은 무엇보다도 이해하기 쉬워서 좋다. 무슨 말인지 알아먹지 못할 현학적인 비평과는 거리가 멀다. 영화학도나 영화광을 상대로 하지 않는, 일반 대중에게 ‘친절한 오동진씨’다. 당대의 영화평론가 중 가장 대중친화적이다. --- 「영화평론가 오동진」중에서
초등학교 때부터 장래희망을 적는 란에 전 ‘영화감독’이라고 쓰고 있었습니다.…단 한 번도 영화감독이 아닌 미래를 꿈꾼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나의 모든 것은 영화를 위해 존재할 정도로 영화에 미쳐 있었고, 지금도 나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 가깝죠. --- 「영화배우 강우석」중에서
한국영화계에 몸담아 온 이래 그는 늘 크고 작은 족적을 남겨 왔다. 포스터와 신문광고 정도나 만들어 개봉하던 1980년대 초반에 보도자료를 만들어 언론사에 돌린 일이나, 영화전단을 만들어 길거리에서 뿌린 홍보전략도 그의 머리에서 시작한 아이디어다. --- 「프로듀서 신철」중에서
에이전트들의 미팅에서는 늘 씩씩하게 굴었다. 무엇보다도 ‘바쁜 척’을 잊지 않았다. 스스로 ‘한국의 줄리아 로버츠’라고도 소개했다. 미팅이 끝날 때면, 언제나 “한국에 돌아가서 영화 끝내고 와야 하니까 두 달 지나서 연락하라.”고 큰소리쳤다. --- 「영화배우 김윤진」중에서
초고라며 내밀기는 했지만, 여러 차례 다듬어 낸 완고에 가까운 시나리오였다. 윤 감독의 ‘신뢰수칙’ 중 하나가 “기대의 크기가 100일 때, 200 이상을 보여 주자.”다. 그의 시나리오에 큰 기대를 걸고 있지 않았던 영화관계자들도 단박에 〈두사부일체〉를 계약하자고 했다. 성공이었다. --- 「영화감독 윤제균」중에서
그는 한때 감독들로부터 ‘공공의 적’이 되기까지 했다. 한창 영화를 촬영하던 중에 감독을 교체하는 ‘강수’를 두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몇 차례씩이나 반복됐다. 감독을 교체하는 그의 이유는 늘 똑같았다. “감독의 비위 맞추기 위해 관객의 즐거움을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 「프로듀서 겸 영화감독 이태원」중에서
배우들이 대사와 표정으로 감정을 표현한다면 스턴트 연기자들은 몸으로 그 감정을 표현해 내야 한다는 그의 ‘스턴트 연기론’은 감독들을 감동시켰다. 그 대신 그의 무술지도를 따르는 후배 스턴트 연기자들은 혼쭐이 났다. --- 「프로듀서 겸 영화감독 이태원」중에서
‘사람이 재산’이라는 생각으로 의기투합해 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채 대표는 바로 그 ‘사람’ 때문에 눈물 쏟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함께 일하던 직원이 사표를 낼 때이다. 대부분은 유학을 떠난다거나 대기업으로 스카웃된다거나 하는 식의 ‘전향적 이별’임에도 채 대표는 펑펑 눈물을 쏟아 그만두는 직원들을 당황케 한다. --- 「마케터 채윤희」중에서
그녀의 죽음은 충격만큼이나 많은 사람에게 사랑과 상실의 의미도 일깨워 주었다. “그녀가 떠난 다음에야 우리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았다.”는 어느 팬의 넋두리는 그녀를 그리워하는 모든 이의 생각에 다름 아니다. --- 「영화배우 최진실」중에서
그녀는 출연작을 선정할 때 철저하게 자신의 판단에 의지했다. 소속기획사의 추천도 듣지 않았고, 주변의 인맥을 통한 부탁이나 압력 따위도 통하지 않았다.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느낌이 오지 않으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두 번 다시 검토하는 경우가 없었다. --- 「영화배우 이은주」중에서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이었다. 일을 즐겁게 하는 것만한 행복이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그걸 일상에서 실천하며 살았다. 자신만 즐겁자고 하지도 않았다. 행복바이러스를 퍼뜨리는 데도 열심이었다. 그녀와 30분만 마주 앉아 수다를 떨고 나면, 누구라도 기분이 좋아졌다.
--- 「프로듀서 정승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