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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안녕이란 인사를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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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안녕이란 인사를 하지 않는다

신정민 | 파란 | 2019년 08월 2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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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08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137쪽 | 218g | 128*208*20mm
ISBN13 9791187756453
ISBN10 1187756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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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란 말에는 생각보다 깊은 뜻이 있다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에게 옷을 갈아입힐 적마다 앉은뱅이 고모에게 진 빚을 갚는 느낌이다

산후조리하다 맞은 침 때문에 평생 앉아서 살게 된 열아홉

절망에 생김새가 있다면
문병 온 친구가 주머니에 찔러 준 흰 봉투같이 생겼을 것이다

하룻밤만 자고 나면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다 아는 사이
비밀 하나쯤 지키겠다는 듯 치는 커튼 그 안에서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곡식 여물지 않을까 봐
논농사 곁에 가로등 세우지 않듯
불 끄고 돌아눕는 것 그것이 안녕이다

잘 자라는 인사 대신
갈아입을 옷 챙겼느냐 실없이 물어 주는 것

문 열면 환한 냉장고의 불빛 같고 다 먹지 못할 간식에 붙여 놓은 번호 같은 안녕

감탄할 수밖에 없는 죽음
커튼 치고 연습해 보는 것 같아서

너를 사랑했다는 것이 아무래도 거짓말이었나 봐
지우게 될 문자를 써 놓고 들여다보는 간병사의 저녁

저녁은 안녕이란 인사를 하지 않는다 ***
--- 「봉투-옷 혹은 육체-자루」 중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세계로 가는 통로가 있다

성체조배 하러 가는 길

온몸에 황금을 칠한 어둠 속에서 찢긴 잠의 절단면을 걷고 있던 사람 하나가 벚나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에겐 그 벚나무 어딘가에 아름다운 나라가 있었던 것이다

셀 수 없는 꽃잎이 되려고

그가 걸어 들어간 벚나무 아래서
내 안에 내리고 있는 새벽 빗소리를 들었다

질 나쁜 종이에 연필심 긁히는 소리

전국의 벚꽃 개화 시기가 조금씩 달랐던 건 사람들이 집을 떠난 시간이 달랐기 때문이다

내가 죽어도 가로수로 서 있을 사람
혹여 누군가 활과 화살을 만들기 위해 이 나무를 베어 낸다 할지라도

바람에 흩날리는 우수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었던 화려한 시절

짧아서 아름다웠던 생
바구니를 메고 있는 새벽이 벚나무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
--- 「사람이 벚나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릇을 뺐다고 연락이 와서
장작 가마 속에 들어앉아 땀을 빼게 되었다

흘러내리는 유약 위에
흘러내리지 않으려는 유약을 바른 토끼 귀 털 문양 그릇
나는 땀 흘리는 그릇이었다

불가마 뒤안에 버려진 파편들
깨지기 위해 만들어지는 그릇 중의 으뜸은 사람이었다

불똥이 튈 때
목 긴 화병 옆구리에 작은 찻잔 하나가 날아가 박혔다

실패하지 않는 우연은
성공작을 위해 눈에 잘 띄는 곳에 진열될 것이다

아무도 그려 주지 못한 무늬를 갖기 위해 받들었던 균열들
땀구멍을 통해 투명한 무늬로 빠져나왔다

도공의 손을 빌려 깨지기로 한 그릇들
원하는 꼴이 아닌 사람들이야말로 꼭 필요한 낭비였다 ***
--- 「불의 이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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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민의 시는 발광(發光)이다. 눈 내리는 겨울밤 저 멀리서 반짝이는 불빛인 동시에 비가 내리는 도시의 밤 처연하게 빛나는 가로등 불빛이기도 하다. 북극의 밤하늘을 신비롭게 수놓는 오로라인가 하면 물고기를 잡았다가 놓아주는 어부의 손길로 다가온다. 다소곳이 시작했으나 그 끝은 울림이 큰 서사들, 모든 시편들 속에 보석 같은 문장 하나씩 콱, 박혀 있다. 철학적 진리체에 가까운 말들이다. “인생은 요약되지 않아서 어려웠다”(「5구역」), “길을 잃는 것보다 사람을 잃는 게 더 큰 문제였다”(「마취의 세계」), “내려가는 것만이 약이었던 고산병”(「기념품」). 이러한 세력들이 요소요소에 포진해 있다. 어둠을 안고 있는 우리의 등을 두드려 준다. 위로나 배려의 마음을 쉽게 드러내기보다는 한 번, 두 번 곱씹어서 야무지게 결론을 내는 방식이다. 거절하기 어려운 부탁 같은 말들이 쉽게 잊히질 않는다. “잘 자라는 인사 대신/갈아입을 옷 챙겼느냐 실없이 물어 주”며 나를 토닥인다(「봉투-옷 혹은 육체-자루」). 나무 그늘 아래에서 쓸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예상치 못한 자문자답, 단순한 물음들은 어려운 경로를 거쳐 낯설게 밀려온다. 사려 깊은 언어들이다. 카드 섹션하듯 나타났다가 겹쳤다가 투명해지는 문장들. “젖은 양말 같은 저녁/뜻밖의 여유로 다가오는 이상한 통증//갈 곳이 없었다”(「마취의 세계」). 눈가에 눈물이 얼비치는 이유다. 시인은 “사람만 한 풍경이 없었다”(「시인의 말」)고 말한다. 신정민의 시들은 사람들의 초상이다. 벚나무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 그래서 우리는 만난 적이 없는 사람, 바다를 건너 구름으로 흘러들어 만나고 온 사람들을 아직도 기억한다. 페르시안 카펫과 같이 펼쳐진 시편들이 시공간을 초월해서 날아다닌다. 죽음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 “죽은 자의 자세가 가장 편했다”(「사바아사나」).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시가 외친다. “목숨보다 눈부신 것 없다//죽도록 살아야 한다”라고(「철학적 홍등가」).
- 정익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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