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 조양회관]
임진왜란 당시 하늘이 내려준 장군이라 하여 ‘천강장군’이라 불렸고, 늘 붉은 옷을 입고 다녀 ‘홍의장군’이라는 별명도 얻었던 의병장 곽재우의 호는 망우당이다. 경북 영천에서 발원하여 경산 하양을 거쳐 대구 동구 반야월 일원으로 흘러들어왔다가 다시 팔달교 아래를 지나 강창에서 낙동강과 만나는 금호강 물가의 효목동 1234-2번지 언덕 위에 ‘망우당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당연히 이곳에는 곽재우 장군의 동상, 임진왜란 당시 영남 지역 의병들의 활동과 7년 전쟁사를 여러 게시물을 통해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주는 ‘임란 의병관’, 영남 지역 임진왜란 호국 영령 315분의 위패가 모셔진 ‘임란 호국 영남 충의단’ 등이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때는 1592년이다. 7년 동안이나 이어진 이 국제 전쟁은 우리나라를 온통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임란의병관은 게시물 [피해와 반성]을 통해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 명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했고, 급격한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를 가져왔다. 가장 큰 피해는 조선에 있었다. 조선은 계속되는 전란으로 농지 면적의 2/3 이상이 황폐화되어 농민의 생활이 어려워지고 국가 재정도 고갈되었다. 많은 사상자로 인구가 줄고 가옥과 재산의 손실도 막대하였다. 민심도 흉흉해져 이몽학의 난과 같은 반란도 일어났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반성’은 없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1598년 이후 312년 뒤인 1910년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임진왜란은 2차 전쟁인 정유재란까지 합해서 7년이었지만 이번에는 35년 동안이나 굴욕과 수탈의 삶을 살아야했다. 반만 년 유구한 우리 국사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시간이었고, 더 이상 모욕적일 수 없는 민족의 수치였다.
1922년 달성 앞에 세워졌던 조양회관이 1982년 임진왜란의 역사를 기억하고 반성하는 공간인 망우당공원 안으로 옮겨졌다. 1910년의 망국을 되새김하게 이끌어주는 조양회관을 이건할 장소로는 역시 임진왜란의 학습 장소인 망우당공원이 가장 적당했던 것인가! 조양회관 네 글자가 본래 조선의 빛을 보겠다는 독립 염원을 담은 이름이었고, 그 이름답게 조양회관은 대구 청년들이 함께 민족의식을 키워가는 만남과 교육의 장이었기에 하는 말이다.
조양회관은 이곳으로 옮겨진 뒤 주로 ‘광복회관’으로 알려져 있다. 광복회가 사용하는 건물로 인식되고 있는 셈이다. 대구 유일의 이전 · 복원 건물이라는 의의를 지닌 등록문화재 4호 문화유산이고, 독립문을 연상하도록 설계된 정문 입구에 걸린 현판도 여전히 ‘朝陽會館’이지만, 그래도 조양회관은 본래 자리도 잃고 이름도 사실상 잃어버렸다. 그런 점에서 문득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가 떠오른다.
(전략)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닦는다 (후략)
조양회관이 본래 자리에. 본래 모습으로 고이 남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건물 앞에 좌상으로 앉아계시는 동암 서상일(1887∼1961) 지사께서 마치 한탄처럼 속삭이는 듯하다.
서상일은 대구의 대표적인 독립지사 중 한 사람이다. 1887년 7월 9일 태어난 동암은 22세이던 1909년 안희제, 김동삼, 윤병호 등과 함께 무장 항일 투쟁 단체인 대동청년단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1910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법과를 졸업할 때에는 한일합방에 항의하여 9인 결사대를 조직, 서울 주재 9개국 공사관에 독립선언문을 배포한다. 1917년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동암은 귀국하여 3 · 1운동에 참여했다가 ‘내란죄’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다.
감옥에서 출소 후 동암은 인재 양성과 국민의식 진작이 민족의 진정한 독립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인식, 고향인 대구로 내려온다. ‘의식분자들의 결집이 절대로 필요함을 생각하고 있던’ 동암은 ‘조양회관을 건립하여 주로 의식분자들의 결집과 계몽 사업에 전력을 기울였다(1957년 8월 발표 [험난할망정 영광스런 먼 길]의 표현).’
[1928년에 제작된 《대구 조양회관 개요》의 ‘연혁’에 ‘서력(서기) 1921년 봄에 몇 명의 동지가 서로 만나 대구구락부 기성회를 조직하고 부관(조양회관) 건축의 회의를 진행할 때 당시 이에 상응하는 동지는 만강의(가득한) 성의를 다하여 각자 부관이 이루어지기를 기약하면서 의연금을 변출하고(나누어 내고) 회(기성회)의 진행을 위하여 사신(몸을 던져) 노력함에 있어 회의 기운은 자못 왕성하다.’라는 표현이 실려 있다.]
많은 인사들이 조양회관 건립에 동참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일제의 방해로 실천에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독립지사 백남채만 벽돌을 제공했다. 서상일은 거의 혼자 재정을 부담하여 (달성공원 앞 옛 원화여고 자리에) 대지 500평, 건평 138평의 2층 건물 ‘조양회관’을 지었다. 압록강에서 가져온 낙엽송 통나무를 사용하여 목조 부분을 지었고, 바닥도 그 나무로 깔았다.
외관은 붉은 벽돌로 장식했는데 한국인 건축가 윤학기가 설계, 백남채가 공사 감독을 맡았고, 중국인 기술자를 초빙해서 일을 시켰다. 창문의 둘레는 화강암으로 정착시켰다. 웅장한 천장에 통나무 대들보가 걸쳐져 있고 기둥이 없는 점은 조양회관의 특징 중 한 가지였다. 서상일은 이 목조 건물에 ‘아침에 해가 가장 먼저 비치는 집’이라는 뜻의 이름을 붙였다. 은근히 민족의식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동암은 조양회관을 대구 청년들의 정신적 구심지로 만든다. 1,000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만이 아니라 회의실, 사무실, 인쇄공장, 사진부에 오락실까지 갖춘 조양회관에서는 시국, 국산품 애용, 상공업 진흥 등에 관한 강연회가 줄을 이었고, 밤에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실시했다. ‘농촌’이라는 잡지도 발간했다.
일제는 조양회관을 모질게 탄압했다. 결국 조양회관은 1930년대 후반 들어 대구 부립(시립) 도서관으로 사용되었고, 심지어 태평양전쟁 막바지에는 일본 보급 부대가 주둔했다. 해방 직후 서상일이 정치 활동을 하자 한민당 사무실로도 쓰였고, 6 · 25전쟁 때는 군대의 병영이 되기도 했다.
조양회관이 다시 조양회관으로 제 면모를 찾게 되는 때는 1954년이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이듬해인 1955년에 원화여자고등학교가 설립되면서 학교 교무실로 변했다. 그 후 1980년 학교 부지가 건설회사에 넘어감으로써 조양회관은 끝내 헐리는 운명을 맞았다. 해체되었던 건물은 1982년 지금 자리에 복건되었다.
3 · 1운동 때 투옥되었던 서상일은 1929년 10월 18일 장진홍 의사의 조선은행 폭파 사건 가담 혐의로 재차 구속된다. 해방 후에도 서상일의 생애는 순탄하지 않았다.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지만 이승만 독재에 항의하다 또 구속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에도 해방 이후에도 구속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뿐이 아니다. 1961년 5 · 16 직후에도 군사정부에 의해 기소되었다. 마침내 서상일은 재판이 계류된 상태에서 1962년 4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