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생의 즐거움을 번번이 할부로 누렸다. 좋아하는 책은 하루에 다 읽기가 싫어서 읽었던 페이지를 반복해서 보았다. 가장 사고 싶은 가방은 ‘나중에, 나중에’를 외치다가 유행이 지났다. 늘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했다. 그래, 나도 한번쯤 질러봐야지. 마지막까지 맴돌던 죄책감마저 비웠다. 그리고 곧바로 퇴직금을 몽땅 털어 세계일주 티켓을 끊었다. 난생처음, 일시불로. ---p.5 프롤로그 ‘일시불로 질러버린 세계일주’ 중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여자들이 가득했다. 담배를 사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가장 가까운 가게에서 담배를 한 갑 구매하는 단계까지는 성공했으나, 라이터를 사는 것을 깜빡 잊었다. 머쓱하게 서 있자 옆에 있던 흑인 여자가 다가와서 라이터를 빌려주었다.‘이게 바로 자유의 맛이지.’ 담배를 몇 모금 피우자 어지럽고 기침이 나온다. 그래도 좋았다. 이제야 해방감을 느낀다. 슬슬 런던이 가깝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p.26 ‘첫 도시, 첫 일탈’ 중에서
모로코 명절은 집에서 양을 잡는 날이었다. 마당에 피가 흥건한 채, 가족 모두가 옹기종기 모여 양을 잡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비명을 지르자 그의 가족은 하던 일을 멈추고 집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안내를 했다. 그런데 창고를 열면 양 가죽이 쌓여 있고, 아궁이를 열면 양의 발목을 태우고 있는 식의 풍경이 이어졌다. 그들이 안내를 할 때마다 아찔해질 수밖에 없었다. 현기증이 나서 잠시 앉아 있겠다며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방금 잡은 양의 간을 내온다. 할머니는 온화한 표정으로 핏물 가득한, 살짝만 익힌 따뜻한 간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p.91 ‘얼떨결에 맛본 모로코 가정식’ 중에서
스카이다이빙을 하기로 결심했다. 중개한다는 숙소에 갔다. 아저씨가 멋진 선택이라고 했다. 젊을 때 자신을 하늘에 던진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아저씨는 언제 처음 해보셨어요?”
갑작스레 궁금하여 물어보았다. 그런데 아저씨는 말을 더듬었다.
“아, 그게……. 음, 내가 처자식이 있어서. 못하고 있어.”
결제를 취소하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회사를 때려치우고 세계일주를 떠났지만, 옆에서 보면 나는 아직도 0도씨일 것이다. 얼음이 되거나 수증기가 되지 못했으니까. 그것이 99도가 되었어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굳이 나에게 맞지 않는 경험으로 온도를 더 올려보려는 짓은 이제 하지 않기로 했다. 미적지근한 내 인생도 그 나름대로 궤적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든다. ---p.128 ‘더도 덜도 아닌 0도씨 내 인생’ 중에서
한국에서 인정머리 없는 미의 기준에 지쳤다면 당장 터키로 떠나기를 추천한다. 간혹 외국 영화를 보다가 ‘정말 저런 말을 듣고 사는 사람들이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만들던 멘트들이 곳곳에서 쏟아진다. 뷰티풀, 고저스, 스위트, 섹시……. 그날도 터키 남자에게 사진 한 장 찍어달라고 부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자존감 회복 멘트가 이어진다.
“한국에서 왔다고? 나 너 알아.”
“어떻게?”
“너 톱 모델이잖아.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아름다운 사진이 나올 수 없어.”
나의 광대는 이미 하늘로 승천했다. ---p.147 ‘자존감 회복을 원한다면 터키로 가라’ 중에서
여전히 비현실적인 나는 인생의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서 이 질문과 마주해야 할 것 같다. 실패할 확률이 매우 높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길을 가고 싶은가. 그때도, 지금도, 앞으로도 내 대답은 한결같을 것이다. 물론 실패할 수도 있지만 까짓것 괜찮다. 덕분에 나는 지금 비현실적이고 영화 같은 일출을 보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졸라 행복하게 말이다. ---p.177 ‘실패할 수도 있지만 괜찮다’ 중에서
방에서 짐을 풀고 옥상에 조식을 먹으러 가는데 부엌에 있는 이가 낯익었다. 아까 그 청년이었다. 몸의 근육을 짐승처럼 쓰며 커다란 가방을 들던 모습과는 영 딴판인 섬세한 손짓으로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잼을 곱게 바른 토스트와 커피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더니 지붕 위에 올라가 목이 늘어난 웃옷을 벗고 누웠다. 해가 막 뜨고 있었다. 내 스타일 외간 남자가 만들어준 토스트를 와그작 씹으며, 함께 해 뜨는 것을 구경하고 있자니 바람을 피우는 기분이었다. 물론 말 한 마디 주고받지 못했지만 말이다. ---p.198 ‘이상형의 남자를 만나다’ 중에서
코끝이 에이지 않을 정도로 날씨가 풀려오면 따뜻한 봄을 상상한다. 그맘때 엄마는 쑥 캐러 다니자고 학원을 빠지자고 했고 애리는 체육 수업을 빠지고 뒷동산에 올라 풀피리를 불자고 꼬드겼다. 그런 식으로 학원과 수업을 빼먹으면 놀아도 노는 것 같지가 않았다. 엄마가 쑥을 캘 때, 애리가 풀피리를 불 때 나는 옆에서 나비 구경을 했다. 나비가 우아하게 날갯짓 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그까짓 수업 빠진 게 뭐 대수인가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이과수는 나비가 정말 많았다. 사방에 걸려 있는 무지개와 함께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제야 이과수를 감상하는 것 같았다. 말없이 한참을 오래된 친구들과 함께 보냈다. ---p.226 ‘까다로운 친구의 조건’ 중에서
여행을 떠나면서 많은 것을 잃었다. 이제 난 백수고 통장 잔고도 없고 보장된 미래도 없다. 여러 생각에 잠긴 채 야마처럼 코카 잎을 씹던 나에게 마지막 날 결국 우유니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것도 늘 상상해오던 하늘이 고스란히 다 비치는 우유니가 말이다. 이걸 바라보고 있으니 건방지게 ‘다 이루었다’는 생각이 든다. 진짜, 난 다 이뤘다. 중얼거리며 하늘을 걸었다. 이제는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그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겠다. 난 우유니에 있었으니까.
---p.295 ‘우유니 소금 사막에서 다 이루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