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버스 운동화에 품이 넉넉한 칼카니 티셔츠, 요즘처럼 쌀쌀한 날씨다 싶으면 챔피언 파카에 털모자 하나쯤은 기본. 거리에 넘쳐나는 젊은이들의 힙합 패션만큼이나 힙합 음악은 어느덧 낯선 이국의 문화가 아닌 매스미디어의 일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 오고 있다.
『입 닥치고 춤이나 춰』를 통해 테크노 음악으로 대표되는 일렉트로닉 댄스 음악의 절규와 황홀을 살폈던 저자는 『힙합 커넥션 : 비트, 라임 그리고 문화』를 통해 힙합 음악과 힙합 음악이 지니는 사회 문화적 함의에 대해서 이야기함으로써, 힙합 음악과 관련 요소들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향유를 꾀하고자 시도한다.
힙합의 역사가 4반세기를 넘어서고, 한국에 힙합이 소개된 지도 15년 이상이 훌쩍 지나버렸으며, 1990년대 후반 한국 젊은이들의 일탈을 규정하는 본격적인 키워드로 힙합이 자리매김한 상황에서, 바이블격은 아니더라도 힙합하면 반사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힙합 가이드북' 하나 변변찮게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안타까움이 이 책의 일차적인 집필 동기. 하지만 힙합의 본고장인 뉴욕에서 힙합을 공부하고 있는 저자의 입장에선 여전히 문화를 바라보는 잣대에 대한 취사 선택이라는 고질적인 딜레마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 문화의 관점에서 타문화를 바라보는 경우, 우리는 편협하고 이기적인 눈으로 그 문화의 사람들과 그들의 문화적 표현물을 재단하고 판단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그들의 입장에서, 즉, 문화적 상대주의의 입장에서 타인의 문화를 보라고 쉽게 해결책을 제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그 문화에 대한 좁은 지식을 바탕으로 단지 조야한 인본주의만이 첨가된 또 다른 왜곡된 잣대를 들이댈 가능성이 높다.”
`네그리튜드(Negritude)의 판결문'은 이런 고민의 연장선상에서 빛난다. `네그리튜드'는 흑인을 경멸적으로 칭하는 니그로(Negro)와 태도를 의미하는 애터듀드(Attitude)의 합성어로서 `흑인만이 지니는 고유한 태도'를 지칭하는 단어이다. 저자는 주류 백인 사회의 시선이 흑인들에 대한 이미지를 왜곡시키고, 흑인들 자신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으로 이를 이용하게 된 `네그리튜드'라는 단어의 역사성을 예로 들어, 힙합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보내든 심한 거부감을 지니든, 진짜 흑인들의 삶에 대한 쿨한 태도를 이해하고 이 문화를 이국자의 입장에서 소비하여 자국민의 문화에 현명하게 반영하는 작업이 힙합을 제대로 향유하는 지름길이라고 전달한다.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 힙합에 대한 철저하고 완벽한 백과 사전식이 아니라 힙합 문화를 보다 풍요롭게 여행할 수 있는 기초적인 가이드를 표방한다는 전략에 맞춰 이 책은 힙합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시한다.
힙합의 고향인 미국의 1970년대 힙합을 통해 힙합의 역사적 행보를 짚어 보며, 힙합의 새로운 경향을 언급하면서 동시에 태생적으로 이종교배적인(하이브리드한) 힙합의 성격에 맞춰 다분히 감상적으로 힙합에 접근하는 위험한 태도를 경계하기를 요구한다. 힙합의 과거와 현재를 앨범을 통해 사례 접근하는 3부 또한 요긴하지만, 4부의 힙합 총정리는 보다 흥미롭다.
“힙합을 무조건적으로 전체 흑인들의 삶과 동일시하는 태도를 지양하고, 아프로-아메리칸 청년들과 백인 사회의 담론과 문화 산업이 다양한 수준에서 갈등, 투쟁, 타협하는 경합의 장으로 전제한다면, 즉 힙합을 네그리튜드와 등치하는 입장을 폐기한다면, 우리는 보다 융통성 있게 힙합을 평가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껏 눈치채지 못했던 힙합이 지닌 고유한, 하지만 지속적으로 진화해 온 독특한 특성 두 가지를 뒤늦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힙합이 지닌 문화적 태도와 요소로서의 `하이브리드함(Hybridity)' 과 사운드의 내용으로서의 `테크놀로지'에 대한 지속적인 집착이다.”
가끔 낯설고 사전을 들쳐보게 하는 단어를 만나더라도 쉽게 짜증내지 말자. 외국어가 등장하는 이유는 보다 정확한 의미를 직접 전달하기 위함이 크다. 이 책은, 문화는 향유하는 과정이 이해하는 과정보다 순차적으로는 앞서지만, 제대로 된 문화의 향유는 그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뒷받침 되었을 때만이 풍요로워질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