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회 한국방송작가상
교양 부문 수상소감
‘방금 〈PD수첩〉 보았습니다. 고생하신 방송 관계자분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번 방송을 계기로 을들의 삶이 나아지길 바랍니다.’
어제 방송이 끝나고 한 치킨 가게 사장님이 제작진 앞으로 보내온 문자입니다. 이번 아이템은 ‘치킨전쟁’이었습니다. 양대 치킨 회사가 싸움을 벌이는 와중에 가맹점주들이 겪게 된 피해를 담았습니다. 법도, 행정기관도 이들 편이 아니었기에 이들이 호소할 데라곤 방송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방송으로 말미암아 이분들의 삶이 조금은 나아지길, 적어도 이분들의 아픔이 널리 알려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네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에 울며 웃으며 분노하며 살아온 지 28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돌이켜 보면, 이 일이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일단 노동 강도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특히 우리네 시사교양 작가들의 일이 그렇습니다. 주 52시간 노동법이 생겨났지만 우리에겐 그림의 떡입니다. 그렇게 일했다간 불방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단기간에 수십, 수백 개의 테이프를 보고, 하루 이틀 내로 편집구성안을 쓰고, 파인 컷팅을 하고, 대본을 쓰는 스케줄이 정말 살인적으로 흘러갑니다. 최소 3~5일 은 뜬눈으로 밤을 새워야 합니다. ‘내가 미쳤지…. 얼마나 부귀영화를 누릴 거라고 이 짓을 또 하고 있네…’. 라는 말이 절로 나오지만 방송이 끝나고 나면 그 생각은 싹 사라집니다. 그리고 다음 아이템을 찾고 있는 저를 발견합니다. 방송으로 인해 누군가 힘을 얻었다면… 세상이 조금 나아졌다면 또 그 맛에 힘이 납니다. 꼭 애를 낳는 것하고 비슷합니다. 애 낳을 때 고통이 너무 크지만, 애가 하는 이쁜 짓에 출산의 고통을 홀라당 잊어버리고 낳고 또 낳고 한다는데… 정말 방송일이 저에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세월에 장사 없다고 저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목과 어깨가 아파 도수치료를 받아왔는데, 급기야 침대에 바로 누울 수조차 없을 만큼 등이 아파서 병원에 갔습니다.
삼십 대까진 깡으로 버텼는데 마흔이 되고, 오십이 되니 깡만으로는 감당이 안 됩니다. 몸이 자꾸 신호를 보냅니다. 이제 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더 방송일이 좋아집니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저는 MBC에서만 28년을 일했습니다. 초창기 때 함께 일했던 PD들은 대부분 퇴직을 했고, 정규직보다 더 오랫동안 MBC를 지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린 PD들이 저를 어려워하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때로는 제가 후배들의 앞길을 막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지만… 한 편으론 제가 후배들의 정년을 늘려주고 있다는 자위를 하며 한 해 한 해 버티고 있습니다. 이제 남은 바람이 있다면 아름답게 퇴장하는 것입니다. 우리 일이 퇴직 일자가 정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솔직히 그때를 가늠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프로페셔널한, 일 잘하는 작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가수가 얼마 전 방송에 나와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후배들에게 정말 꼰대는 되고 싶지 않다.’ 저도 그와 같은 생각입니다. 작가 후배들에게 꼰대가 아니라 항상 젊은 언니, 힘센 언니이고 싶습니다. 일하는 동안 그들의 바람막이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저는 프로그램을 ‘잘’ 만들어야 합니다. 방송사 측과 대등한 관계에서 대화를 하려면 제가 실력이 있는 작가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방송작가협회에서 주시는 이 상이 저의 이런 바람에 힘을 실어주는 것 같아 기쁘고 한편 고맙습니다. 항상 제가 가진 능력보다 더 많이 인정받고 누리며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정진하겠습니다.
제33회 한국방송작가상
라디오 부문 수상소감
80년대 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던 한 정치인이 “고문을 당할 때 정말 미웠던 건, 비명소리를 가리려고 크게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였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괴로워 죽을 것 같은데,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즐겁고 따뜻한 세상 얘기며 평화로운 노랫가락이 참을 수 없었단 얘기. 원고를 쓸 때마다 ‘누가 어디서 뭘 하면서 듣고 있을까?’ 항상 신경이 쓰이는데 손님은 늘 불특정 다수. 모두의 기분을 챙길 수가 없다. 특히 시시각각으로 불안한 코로나 상황에서 방송을 했던 올해는, FM 라디오의 밝은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즐거움은 커녕 스트레스가 되진 않을지…. ‘속 편한 얘기 하고 있네’ 인상을 구기며 채널을 돌려버리는 건 아닌지…. 원고를 쓰다가 오금이 저려올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DJ의 멘트 하나에 많은 청취자들이 문자를 보내줄 땐 그 순간이 너무나 짜릿하다. 얼마 전엔 ‘지금 가장 높은 데서 방송을 듣는 분은 누굴까’라는 한마디에, 아파트 38층, 북한산 정상에서 문자가 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시간 내내 경쟁적으로 고층 인증 메시지가 쏟아졌는데, 세상에~ 같은 시각 잠실의 시그니엘 호텔 82층, 97층, 102층에서 방송을 듣고 있다는 문자가 도착해서 우리는 급 이벤트를 하기도 했다. 생방송 라디오가 모두의 기분에 맞출 수는 없지만, 각자 다른 마음이 비슷하게 움직이는 순간은 많다.
21세기가 시작되기 딱 석 달 전, 〈엄정화의 가요광장〉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해 12월 20세기 최고의 가수를 뽑기 위해서 청취자의 편지와 팩스, 몇 통 되지 않는 인터넷 사연을 정리했는데, 모든 게 디지털화돼있을 것 같았던 방송국은 그야말로 원시적이었다. 선배작가와 담당PD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모여앉아 밤늦도록 조용필 김건모, 서태지를 외치며 바를 정(正)자를 그려 20세기 가요계를 정리했다. 이렇게 주먹구구식이라고? 충격적이었다^^
이제 21세기도 20년이 지났다. 방송환경과 매체의 변화가 요란하다. 새로운 방송 플랫폼이 수없이 생겨나면서 라디오와 TV라는 방송의 두 가지 구분이 사라진 지도 오래. 경쟁 구도도 전과는 전혀 다르다. 수많은 1인 방송과 인터넷 채널, 스마트폰 어플까지. 시청자와 청취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프로그램이 하루에도 수없이 생겨난다. 그 중엔 라디오의 감성으로 소비자를 끄는 방송도 많은데, 라디오가 마지막 하나 남은 아날로그 감성이 아니라 같이 경쟁하는 방송이 된 것 같아 오히려 반갑다.
20년 만에 다시 〈가요광장〉 작가로 일하게 됐는데 이런 상을 받게 되다니, 웃음이 절로 난다. 싫증이 잦은 성격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 같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건 매일 매일이 변화무쌍한 청취자와,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DJ때문이다. 국민배우 박중훈 씨의 말을 쓰다가, 탑 개그맨 박명수 씨의 원고를 쓰고, 지금은 걸그룹 에이핑크의 정은지가 DJ라니, 이건 좀 사기 아닌가?
좋은 DJ와 이해심 많은 동료들과 일해 왔다. 상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혼자 흥에 겨워 밀어붙인 일들이 떠올라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원고 쓰는 것보다 생일카드 한 장 쓰는 게 더 힘들더니만, ‘수상소감’은 최고로 어렵다.
큰 글씨로 THANK YOU 한 줄 쓰고 싶은데 그냥 떠오르는 얼굴을 죽- 나열해도 되는 걸까?
일생 걱정만 드리는 딸에게 뭐 이렇게까지 관대한 사랑을 주실까 의문마저 드는 부모님께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혼날 만큼 넘치게 담아서 보내고 싶다. 늘 미숙하고 흔들리는 나에게 너그러운 농담을 건네주는 친구들에게 고맙고, 함께 일해온 모든 선후배 작가와 PD, 또 이런 인사를 전할 기회를 주신 작가협회에도 깊은 감사 인사 전한다. 그리고 자부심을 갖고 라디오 원고를 집필하시는 선배님들께 존경의 마음 보냅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