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렇게 춥고 불편한 집을 떠나지 않은 이유 역시 이 집을 사랑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집 앞 골목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마당에서 물놀이를 하며 흠뻑 젖은 아이들을 볼 수 있어서 우리는 이 집을 사랑했다. 여름밤이면 우리도 바람을 넣은 작은 풀장에 몸을 담그고 맥주를 마시면서 하늘을 볼 수 있어서 이 집을 사랑했다. 절대로 끝날 것 같지 않던 겨울이 지나고 거짓말처럼 봄이 찾아왔을 때 눈물겹게 행복해지게 해줘서 이 집을 사랑했다. 잘 살아보려고 애쓰게 해줘서 이 집을 사랑했다. 쉬운 선택을 하지 않게 해줘서 이 집을 사랑했다.
---「추운 집에 사는 여자」중에서
따지고 보면 집이 삶의 모양을 바꾼다는 것도 결과론적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는 어떤 식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니까. 아파트에 계속 살아서 더 잘 살았을지 모른다. 추운 집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엄청난 행운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해석한 것일 뿐이다. 그러니 잘못해서 끔찍한 집을 골라 그 집을 떠날 수 없다 해도 악전고투를 계속하다 보면 그럭저럭 살 만한 집이 될 수도 있다. 우리의 추운 집이 바로 그런 집이었다. 틀린 답도 정답인 척 살아가는 내 맘대로 인생, 안 되면 도망치면 된다. 8년 만에 도망친 우리처럼. 도망치는 건 욕먹을 일이 아니다. 왜 삼십육계 줄행랑이라는 말이 있겠는가!
---「그 후의 이야기: 낡은 집에 사는 여자」중에서
피해는 주지 않되, 눈치는 보지 말자. 요즘 많이 생각하는 말이다. 이러다가는 내가 좋아하는 대로, 내가 바라는 대로, 내가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남들과 다르지 않게 사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될지도 모른다. 고작 목표가 ‘남과 다르지 않게’, ‘너무 튀지 않게’라니, 너무 슬픈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목표로 삼을 만한 일은 아니다. 그러니까 배가 나와도, 가슴이 처져도 수영복을 입을 것이다. 수영복만 입을 것이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그저 그게 내가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원피스 수영복 철학」중에서
나는 이곳의 말을 못하는 사람이다. 나는 다른 얼굴을 가진 사람이다. 나는 돈을 쓰는 사람이다. 나는 곧 떠날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특별대우를 받기도 하고, 무시를 당하기도 한다. 기분이 좋아질 때도 있고, 기분이 나빠질 때도 있다. 어쨌든 나는 특별한 사람이다.
내가 나고 자란 나라에서는 내가 지나가도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지만, 이곳에서는 모두 나를 쳐다본다. 어설픈 영어로 말을 걸어주기도 한다. 수작을 걸기도 한다. 친구가 되기도 한다. 사기를 치기도 한다. 내가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함피의 기차역에서」중에서
20대의 나는 내가 누구인지 잘 몰랐다. 내게는 나를 발견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이 필요했다. 쓸 수 있는 모든 패를 꺼내 쓰고, 해볼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시도해봐야 했다. 이상을 향해 달리다 고꾸라지거나 실망한 채 뒤돌아서는 경험들이 필요했다. 아주 먼 곳에서 나 자신을 만나야 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의 내게는 그런 일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나는 이제 이것이 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좋으나 싫으나 이 몸뚱이와 정신머리를 끌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나 자신을 발견하기보다는, 가족을 돌보고 생계를 꾸려나가고 하고 싶은 일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전처럼 여행을, 떠나는 일을 갈망하지는 않는다.
---「그 후의 이야기: 여행이 싫어졌습니다」중에서
내일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의 햇살과 바람과 공기를 제대로 느껴보자. 아이들에게 품는 욕심도 슬쩍 접자.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고민과 두려움도 어차피 내일이 오지 않는다면 부질없다. 그냥 현재에 충실하면 된다.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며 후회 없이 살아가자. 미래 같은 건 운에 맡기자. 어차피 미래란 건 차곡차곡 쌓아올린 현재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내일은 오지 않을지도 몰라」중에서
그 시절 내 주변에는 내 인생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커다란 나무에 벌레와 새와 벌과 나비와 다람쥐가 모여드는 것처럼. 그건 꼭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한 달에 30만 원으로 나는 부자의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 말도 안 되는 꿈처럼 느껴지는 것들 중 대부분은 막상 해보면 별것 아니다. 집이 아닌 곳에 나만의 공간을 꾸리는 건 약간의 목돈을 들이고 지출을 감수한다면 가능한 일이다. 대박을 바라지만 않는다면 카페의 주인이 되는 것, 장사를 하는 것도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시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꾸려나가는 일이 힘겨울 뿐이다.
---「그 후의 이야기: 카페는 문을 닫았습니다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