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출제되었나. 수능에는 한 작품이 출제되었고, 최근 EBS에 작품이 연달이 실리고 있다. 뒷 장 표를 참조하면 더 자세히 볼 수 있다.
삶과 작품경향.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으로, 일제 강점기의 시인이자 작가, 소설가, 수필가, 건축가이며 아방가르드 문학가이다.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학교 추천으로 조선총독부 건축과 로 발령 받았다. 1930년 조선총독부가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일반에게 홍보하기 위해 펴내던 잡지 《조선》 국문판에 데뷔작이자 유일한 장편소설 《12월 12일》을 필명 이상(李箱)으로 연재하였다. 1931년 이상은 폐결핵 감염 사실을 진단받았고 증세는 점차 악화되었다. 1933년 폐결핵으로 직무를 수행키 어렵게 되자 기수직에서 물러나고 황해도 에서 요양하였다. 이곳에서 알게 된 기생 금홍과 종로 1가에 다방을 개업해 동거하였다. 같은 해 문학단체 구인회의 동인인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박태원 등과 교류를 했으며, 정지용의 주선을 통해 잡지 《가톨닉청년》에 〈꽃나무〉, 〈이런 시〉 등을 발표했다. 이듬해 시 〈오감도〉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했지만, 너무도 노골적인 성적 표현으로 독자들의 항의와 비난에 시달려 연재를 중단했다. 같은 해 같은 잡지에서 연재된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1936년 구본웅의 알선으로 창문사에 근무하면서 구인회 동인지 《시와 소설》 창간호를 편집 발간했고, 단편소설 〈지주회시〉, 〈날개〉를 발표하면서 관심을 받았다. 1937년 사상 혐의로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다 폐결핵 악화로 출감한 뒤 병원에 입원했고 결국 28세에 사망했다. 동료 문인이자 친구인 박태원은 이상에 대해 "그는 그렇게 계집을 사랑하고 술을 사랑하고 벗을 사랑하고 또 문학을 사랑하였으면서도 그것의 절반도 제 몸을 사랑하지 않았다." 면서 "이상의 이번 죽음은 이름을 병사에 빌었을 뿐이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역시 일종의 자살이 아니었든가 - 그러한 의혹이 농후하여진다." 고 하기도 했다. 그를 기려 출판사 문학사상사에서 이상문학상을 1977년 제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 2008년에는 현대불교신문사와 계간 ‘시와 세계’가 이상시문학상을 제정해 역시 매년 수상자를 내고 있다. 2010년에는 탄생 100주년을 맞아 생전에 발표한 작품과 사후 발굴된 작품을 포함해 그의 문학적 세계를 재발견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이상은 작품 내에서 문법을 무시하거나 수학 기호를 포함하는 등 기존의 문학적 체계를 무시한 새롭고 실험적인 시도를 하였다. 문법파괴와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한 특유의 서술방식은 주인공의 무의식적인 내면을 잘 드러내며, 기존 문학에 대한 반감을 의미하는 동시에, 서술의 대상을 없애고 언어 자체에만 비중을 둔다. 또한 그의 작품은 줄거리의 전개방식이 명확하지 않고 주인공의 내면에 치중되어 있는 특징이 있다. 이는 한국어 문학에서 시도된 적이 거의 없던 것이며, 이로 인해 그의 작품들은 발표 직후부터 현대까지 문학계에 큰 충격을 주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