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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로운 어느 날의 물건
중고도서

사사로운 어느 날의 물건

: 일러스트레이터 배현선의 사는 마음

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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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5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208쪽 | 254g | 128*175*12mm
ISBN13 9791191623000
ISBN10 1191623009

중고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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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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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순이 묵은 순이 되어 가는 과정은 인간의 삶과도 어딘가 많이 닮아 있었다. 인간은 작고 여린 존재로 태어나 넘어
지고 다쳐 가며 성장한다. 식물도 가끔 벌레의 공격을 받거나 잎이 노랗게 시들어 결국 떨구어 낼 때도 있지만 새 잎을 내며 성장한다. 우리 모두는 분명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렇게 조금씩 견고하게 ‘진정한 어른’이 되어 가는 것처럼 몬스테라도 여름의 햇살을 온몸으로 만끽하고, 쥐죽은 듯 웅크리며 겨울을 났다. 그렇게 몇 번의 계절을 돌고 돌아 연두는 초록으로 물들어 갔다. 그 조용한 변화와 강인함을 지켜보며 어쩐지 나는 용기를 얻었다. 고작 세 뼘 크기의 화분에 사는 몬스테라도 삶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라니.
--- p.18-19

이틀 뒤, 집으로 옷이 도착했다. 아주 강렬한, 그리고 동시에 맑은 느낌의 세룰리안블루 색상 울 스웨터를 보자마자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바란 완벽한 색이었다. 청명한 가을 하늘을 떠올리게 하는 푸른색이었다. 목 부분은 적당히 잡아주는 크루넥 디자인이었고, 어깨선은 래글런 스타일로 몸에 맞게 자연스럽게 떨어졌다. 굉장히 부드러운 울 소재와 딱 달라붙지 않는 여유로운 핏으로 입었을 때 편안한 느낌이었다. 언뜻 보면 굉장히 튀는 색상일 수 있지만 장식적인 부분이 배제되어 있어 어떤 하의를 입더라도 깔끔하게 코디할 수 있는 스웨터였다. 어쨌거나 이 옷이 마음에 쏙 들고, 나에게 잘 어울린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런 옷이 있다. 입고 있으면 어쩐지 행운을 불러다 줄 것만 같은, 기분이 좋아지는 옷.
몇 주 뒤, 여행지에서 스웨터를 입고 길을 걷는데 옆을 지나가던 행인이 옷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내게 말했다.
“This color makes me happy!”
--- p.49

문방구를 나서며 만지작대던 사탕 몇 개를 주워들었다. 계산을 하고 바로 껍질을 까서 막대사탕을 입에 물었다. 혀
에 닿는 깔깔한 촉감과 불량식품에서만 느낄 수 있는 단맛, 그리운 추억의 맛은 20년 전과 놀랍도록 똑같았다. 모든 것이 변했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분명 그 시절의 나도 어딘가에 살아있으리란 희망을 품어도 괜찮지 않을까. 사라지거나 바뀌어 버린 것이 아니라 그저 중첩되고 있을 뿐임을 깨달았다. 열 살, 스무 살의 나도, 서른 살의 나도.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서로를 의지하며 포개어 눕듯 모든 내가 차곡차곡 모여 갈 것이다.
--- p.107-108

거의 전 국민이 사용하리라고 생각하는 K사 메신저의 ‘선물하기’에는 ‘나에게 선물하기’라는 것이 있다. 처음 보았을
때 참 재밌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구매하기’라고도 할 수 있는데 구태여 ‘선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점이 다분히 의도적이지 않은가. 실상은 같은 행위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상당히 다른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그만큼 선물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즐거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알 수 있다. 클릭 몇 번에 손쉽게 상대방에게 무엇이든 보낼 수 있는 세상이 되었을지라도 본질은 변함이 없다. 그 의미를 읽어내고 이해해야 한다. 나에게, 그리고 소중한 사람에게 보내는 선물이 필요한 오늘이다. 전하고 싶은 마음을 고이 담아 오랜만에 선물을 하고 싶은 얼굴들을 떠올려 본다.
--- p.139

조랭이는 모두의 노력 끝에도 결국 아주 먼 곳으로, 손닿지 않는 곳으로 가버렸다. 사인은 급성 심정지였다. 어딘가
조랭이다운 깔끔하고 쿨한 이별이었다. 동생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집으로 다시 데려온 하룻밤 사이에 고양이의 몸은 천천히 굳어갔다. 하지만 약간 벌어진 입은 묘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많이 앓다가 떠난 게 아니어서 그래도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죽음은 모든 생명에게 주어진 숙명이건만 우리는 죽음과 마주할 때마다 자꾸만 주춤거리고 두려워하고 슬퍼하게 된다.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남겨진 자들이 짊어질 그리움의 무게는 더해지겠지만, 덕분에 행복했노라고 마지막 인사와 함께 속삭여보았다. 필연적인 헤어짐 앞에서 아직은 그저 서툰 사람이고 싶다.
--- p.149-151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분간할 수 없는 희뿌연 안개가 구름과 뒤섞여 더욱 비현실적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검은 바위 사이사이로 흰 눈이 내려앉았고 사방으로 높디높은 산봉우리가 파노라마처럼 넓게 펼쳐져 있었다. 지구가 아닌 또 다른 행성에 발을 디디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질적이고 무한히 아름다우면서 경이로운 그 자태에 위압감과 두려움마저 들었다. 이 산에 비한다면 나는 한낱 미물에 가까웠다. 거대한 히말라야의 품에서 그저 작고 나약한 존재인 것처럼 여겨졌다. 영하 20도의 추위에 사시나무처럼 떨었으며, 지금은 숨을 쉬는 것조차, 앞으로 발을 내딛는 것조차 힘겨워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 한 걸음 애를 쓰며 나아가려 노력했다. 거창한 이유들은 사라지고, 걷는다는 행위 자체만 남아 있었다. 문득 그냥 그거면 된 거 아닐까 싶었다. 다른 생각은 그다지 하지 않게 된다. 아주 단순하지만 명확하게 온통 ‘걷는 것’에만 집중한다. 머지않아 사라지고 없을지라도 스스로의 발자국을 이어가는 것. 이것은 유의미한 몸짓이라 느꼈다.
--- p.187-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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