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아버지는 할아버지 산소를 순천에서 제일 높고 명당이라는 봉화산으로 이장하고는 작은 부인을 보아 나를 얻었다. 1957년, 아들이 태어난 것은 집안의 큰 경사였다. 내 이름은 장호. 글 장(章)에 넓을 호(浩) 자다. 작명가에게 쌀 열 가마니를 주고 지은 이름으로, 공부 잘하고 널리 이름을 떨치라는 뜻이다.
--- p.16
중학생 시절을 그렇게 보내고 고등학교에 가야 하는데, 공부에는 전혀 관심도 없을뿐더러 어머니가 이제 학교는 그만 다니라고 해서 학업은 작파하고 일하러 다니기로 작정했다. 철공소에도 다니고, 밤이면 이른바 ‘야방’이라는, 건설현장 자재 지키는 일도 했다. 그런 중에도 시간 나는 대로 열심히 복싱 연습을 하다 보니 고등학교 졸업할 나이가 되었다.
--- p.22
주로 철근과 파이프를 파는 우리 가게는 직원이라곤 경리 아가씨 하나였는데, 내가 들어가서 둘이 되었다. 사장님이랑 셋이서 일하게 된 것인데, 나는 가게로 찾아오는 손님한테 물건을 팔고, 사장님은 큰 건축현장에 납품하는 일을 주로 맡았다. 장사가 잘 되는 편인 데다가 사장님이 워낙 성실해서 가게에 성가신 문제는 없었다. 같이 올라온 친구 도식이와 후배 훈이는 망치를 만드는 대장간에 취직해서 잘 다녔다. 가게들이 가까운 데 있어서, 정호 형이랑 우리는 시간 나는 대로 종종 어울려 하루의 고단함을 달랬다.
--- p.47
유흥업소에서 싸움이 나거나 사고가 터지면 우리가 경찰보다 먼저 가서 상황을 정리하는데, 처음에는 좋은 말로 말리다가 그래도 정 안 들으면 두들겨 패서 쫓아냈다. 그러면 경찰이 폭력 행사라며 우리를 잡으러 오기도 하는데, 그럴 땐 옥상으로 올라가 옥상 외곽의 비상계단을 타고 내려가 도망가곤 했다. 취객이 많은 주말이면 어김없이 이런 활극이 벌어지곤 했으니, 주말에는 체육관 운동보다는 유흥업소 현장에 가서 뒤치다꺼리하거나 사고 처리하느라 바빴다. 그러니 복싱 실력은 잘 모르겠고, 실전 싸움 실력은 나날이 늘었다.
--- p.53
나는 그중에서도 주로 깡패 행세하는 놈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가 괜찮다 싶으면 잘 설득해서 우리 조직에 식구로 들였다. 그런 가운데 나를 만만하게 보고 코웃음을 치거나 불량스럽게 구는 놈들은 밖으로 데리고 나와 맞짱을 떴다. 자그마하니 여리게 생긴 것만 보고 얕잡아봤다가 나한테 한주먹에 깨진 건달들은 진심으로 승복하고 대번에 무릎을 꿇었다. 종종 한 번에 승복하지 않고 힘이 다 파일 때까지 몇 번씩 대드는 놈도 있었는데, 나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제압하여 친구나 아우로 삼았다.
--- p.116
청운의 꿈을 안고 천 리 고향을 떠나 머나먼 서울까지 왔다가 졸지에 조직폭력배 두목으로 TV 뉴스까지 나오게 된 내 처지가 기가 막혔다. 그것도 내 나이 고작 스무 살이다. 그 형사 놈들 실적 땜빵 놀음 때문에 흉악한 깡패 두목이라고 전국적으로 알려지고 말았으니, 이번에는 구치소에만 있다가 곱게 나오기는 글렀지 싶었다. 분명히 실형을 받고 상당 기간 교도소에서 썩어야 할 터였다. 판사가 봐주고 싶어도 언론의 주목을 받는 피고인이라 봐줄 수 없게 판이니 재판의 선처를 기대할 수도 없었다.
--- p.177
공장뿐 아니라 감방 안 생활도 마찬가지다. 어쩌다 식빵이라도 들여오면, 배에 기름기가 없어 식빵에 버터를 듬뿍 발라 그 큰 식빵 한 줄을 옆구리에 차고 왔다 갔다 하면서 다 먹어치웠다. 그 식빵도 일주일에 한 번 먹기가 힘들었다. 나는 실질적인 감방장으로서 어떻게 하면 같은 방 사람들 배 안 곯게 할까 궁리했다. 그러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방에서 카드 노름을 시켜놓고 개평을 얻은 돈으로 취사장에서 누룽지로 바꿔먹으면 되겠구나. 하하하.
--- p.203
자정이 되자 집에 있던 분들이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혼자 남은 술을 홀짝홀짝 마시다가 갑자기 서러움이 북받쳐 집 안에 있는 전등불을 다 켜놓고 집 앞에 있는 동네 당산나무 밑에 가서 큰 소리로 울었다. 엄니, 엄니, 아이고 울 엄니, 꺼이꺼이…. 그러자 가까이 사는 동네 아줌마들이 난데없는 울음소리에 잠이 깨서 나와 나무랐다.
"야 이놈 장호야! 그러게 살아계실 때 엄마를 잘 모셔야지? 서울에다 무슨 꿀단지를 발라놨다고 까딱하면 서울로 끼대올라가고 하더니 처량하게 당산나무에서 처울기는 왜 처울어 이놈아. 그만 처울고 집에 들어가서 자빠져 자, 이놈아.“
--- p.311
2권
이리 건달이면 자존심도 셀 텐데, 해송이 형이 나와는 초면임에도 나를 인정하고 선선하게 협조를 해줘서 기분이 좋았다. 나는 이렇게 마음의 은혜를 입으면 그 몇 배로 잘하려고 애쓰는 기질이었다. 아마 내가 없는 사이에 우리 아우들에게 나에 대해 듣고 어느 정도 파악한 모양이었다. 건달도 이렇게 서로에 대해 알고 인정할 건 인정할 줄 알 때 건달이지 유아독존 자기만 잘난 줄 알고 기고만장하여 상대방 무시하면서 설치면 양아치다.
--- p.94
나는 예식장 입구 양쪽으로 아우들 50여 명을 줄 세워 내가 조직폭력배 두목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과시한 것이다. 나와 의형제처럼 지내는 코미디언 형이 결혼식 사회를 보고 공단 이사장님으로 있는 현역 국회의원이 주례를 섰다. 결혼식은 그야말로 성대하게 치러졌지만, 부모님이 두 분 다 없어 마음 한쪽이 허전했다. 부모님의 빈자리는 사촌 형님 내외가 대신 채워주었다. 나는 결혼식 내내 울컥하여 울음을 참느라 힘들었다. 아버지는 모르겠고 어머니 생각이 간절했다. 엄니, 나 결혼한 거 보고 계시지요? 함께하지 못하지만 고마워요. 이나마 엄니 덕분에 커서 장가도 가요.
--- p.142
나는 여전히 교도소 요시찰 재소자로 분류되어 독방에 수용되었다. 고향 같은 영등포구치소를 떠나 객지와 같은 춘천교도소로 이감을 와서 독방에까지 수용되니까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외로웠다. 운동도 하지 못하고 하루에 세 번 밥 먹을 때만 사람 구경을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요시찰도 묵은 요시찰이어서 책은 마음대로 볼 수 있었다. 사회생활 하면서는 책 볼 시간이 전혀 없고 책에 관심도 없었지만, 독방에서는 책 읽는 것 말고는 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저절로 강제 독서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책 읽는 재미가 생겼다. 책 속의 글이 너무 달콤하고 재미있고 배울 점이 많았다. 야~ 이래서 사람들이 공부를 하고 책을 읽는구나, 싶었다. 나는 그때부터 심심하면 찬송가도 부르고, 이 책 저책 가릴 것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 p.233
나는 한편으로는 중년으로 접어드는 나이도 나이인 만큼 이제 깡패나 건달 딱지를 떼고 싶었다. 그래서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살려고 애쓰는 한편 이미지 관리에도 무척 신경을 썼다. 지역구 국회의원 밑에서 지구당 부위원장도 하고, 중앙로터리클럽 초대 회장도 하고, 지체장애인협회 고문도 하는 등 다양한 직분을 맡아 지역사회에 봉사하면서 지역민들하고도 활발하게 교류했다. 또?호남향우회 지회장을 맡아 고향 사람들과의 안면도 넓혀갔다. 전직 조폭이라는 꼬리표를 붙여 경기 경찰청하고 의정부 지검에서 매년 나의 동향을 내사하는데, 그게 보통 귀찮은 게 아니었다. 우리 지역 국회의원이 나더러 그 세계에서 완전히 손을 떼라고 하면서 보증을 서준 덕분에 나는 ‘내사 종결’을 받고 좀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
--- p.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