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 아홉 기단을 층층이 오르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를 때쯤이면 석룡이 되어 무량수전 앞마당에 길게 누워 있는 선묘 낭자를 다시 만나게 된다. 한 명의 여자로 태어나 한 명의 남자를 만나고,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것에 목숨을 걸었던 그녀. 사람은 사랑하고 있을 때 가장 행복하며 가장 아름다운 법. 그러고 보면 아직도 죽지 않고 영원히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있는 선묘 낭자야 말로 영원히 아름답고, 영원히 사랑스러운 여자가 아닌가.
스산한 바람이 휘휘 부는 범종루의 목어는 툭 툭 툭 번뇌를 떨치며 깨닫고, 오늘밤도 무량수전 앞 보리수 나무가 파도소리를 내며 운다. 선묘 낭자는 또 그렇게 조사당 마루에 지팡이 하나를 꽂고 떠난 의상대사를 그리워하고 있는 모양이다. --- 대상, 박순의 ‘부석사 선묘 낭자에게 띄우는 편지’ 중에서
마을 위쪽에 저수지 역시 핑크빛 복사꽃의 반영을 한 아름 담았다. 꽃을 낚는 낚시꾼이 신선처럼 보였다. 노란 유채꽃과 묘한 대비를 이룬 핑크색 복사꽃.
천국 가는 길이 바로 이런 길이 아닐까. 사람만 취한 것이 아니었다. 복사꽃에 흠뻑 취한 까치는 도무지 날려고 하지 않는다.
복사꽃을 따먹는 까치를 본다. 조심스레 렌즈를 바꿔 끼우고 셔터를 누른다. 복사꽃은 오래될수록 꽃이 짙다고 한다. 분홍이 짙을수록 수령이 오래되었다고 보면 된다.
특이하게도 복숭아밭 아래는 민들레가 피어 있었고 노동의 성스러움에 시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너른 복숭아밭을 가꾸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꽃을 향한 농부의 따뜻한 마음을 알게 된다. 여인네가 빨래를 한다.
“우리 마을은 복숭아꽃으로, 우린 물로 빨래를 합니다.” --- 금상, 이종원의 ‘하트모양의 동공으로 복사꽃 바라보기’ 중에서
마을에는 그 흔한 가게도, 식당이나 술집도 없어 이곳을 찾는 이들이 식사할 곳이 없지만,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낯선 이가 빈 손으로 예고없이 방문했음에도 친손주 대하듯 반갑게 대해준다. 마을에서 보낸 몇 시간 동안 대접받은 음식 종류만 족히 열 가지가 넘는다. “대추를 보고도 먹지 않으면 대추처럼 쪼글쪼글 늙는대.”하시며 마당에 널어놓은 붉은 대추를 한 웅큼 가져 오신다. 즉석 모닝커피는 물론이고 삶은 땅콩, 포도, 인절미, 찐 옥수수, 마을 앞 냇가에서 잡았다는 피리조림에 소주 한 잔, 나중에는 식사대접까지 받았으니 무심하게 발길을 돌리기 어려운 사랑의 빚을 지게 되었다.
“일을 많이 했더니 아직도 손이 자라는 모양이야.”하시며 쑥스러운 듯 거친 손을 내밀던 할머니, 외갓집에 놀러 와서 하루 종일 자연과 시간을 보내던 서울 꼬마들, “여지껏 끊지 않은 담배를 이 나이에 뭣 하러 끊어.”하시던 할아버지, 150년이 더 된 옛 맛 물씬 나는 댓돌이 그렇게도 귀하다시던 할머니, 모두 이 마을에서 만난 아름다운 분들이시다.
--- 은상, 이강영의 ‘무섬마을 공동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