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일이나 피부 관리를 받고 비싼 돈 들여 메이크업을 받은 보람이 있다. 파우더 룸 조명 덕인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얼굴도 꽤 괜찮은 듯 보였다. 우월한 유전자란 유전자는 언니가 다 땡겨 쓴 탓에 정작 자신에게 배당된 것은 하얀 피부와 큰 눈뿐인 것이 안타까울 뿐.
제연이 꼭 입으라던 단아한 화이트 재킷에 블랙 스커트도 제법 잘 어울렸다. 평소엔 절대 입지 않는 유의 투피스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두어 달 전 물들인 밝은 갈색 컬러의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급하게 선택한 컬러치곤 썩 마음에 들었다. 잘 정돈한 머리를 가슴 바로 위에서 뱅글뱅글 말아 감곤 가만히 거울에 비친 제 모습과 눈을 맞췄다. 맞선녀의 전형을 하고 있는 꼴이 몸서리쳐질 만큼 어색하지만, 뭐 한 번쯤 이런 경험도 나쁘지 않겠거니 생각했다.
문득 올해 안에 내 인생에 ‘별 일’이 생길 거라던 연애전문 점쟁이의 말이 떠올랐다.
악 소리 날만큼 멋진 남자가 나타나 결혼하자 들이댈 거라나? 그런 데다 깨물어 죽이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연하남의 열렬한 구애까지 한꺼번에 받게 될 테니 둘 중 어느 놈을 고를지 결정이나 잘 내리라던 돌팔이.
멋진 남자는커녕 오르지 못할 나무 밑에 서 있느라 목이 꺾일 판이오. 깨물어 죽이고픈 연하남은 개뿔, 말 안 듣는 제자들만 득시글거릴 뿐이다. 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게 했던 헛소리 작렬 점쟁이. 호언장담하던 올해가 한 달도 채 안 남았는데 이제 어쩔 테냐! 내 너를 용서치 않을 테다!
맞선을 보는 동안 부디 바람이 있다면 가뜩이나 웅장한 배경을 지닌 그 남자의 외모까지 화려하진 않기를. 안 그래도 기우는 자신을 아주 엉덩방아까지 찧게 하진 않기를.
제이는 그 한 가지만을 소망하며 요즘 맞선의 메카로 불린다는 청담동의 한 호텔 최고층의 재즈 바Bar에 자리를 잡았다. 미리 사진이라도 보내 줬다면 좋으련만. 그에 대한 정보라곤 잘난 명예와 지위에 관한 것들뿐인 탓에 입구로 들어서는 남자들을 일일이 살펴야 하는 수고로움까지 겪어야 했다.
오, 저 남자 정도면 괜찮네. 딱 좋아, 평범하니.
설마 저 아저씨는 아니겠지. 머리 반이 비었는데.
그 후로도 몇 명. 다른 테이블로 향하는 남자들의 뒤 꼭지에 대고 한숨을 쉴 때쯤, 바Bar에 들어서는 남자가 있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훑는 데만도 한참이 걸린 남자. 깔끔하게 빗어 넘긴 헤어는 아마도 그의 평소 성격을 대변하는 것일 테고, 도저히 20분 이상은 마주 앉아 있기 부담스러울 것 같은 완벽한 마스크에 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그뿐인가. 흡사 블랙을 연상시키는 다크 네이비 슈트는 마치 그를 위해 제작이라도 한 것처럼 완벽한 실루엣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런. 너무 뚫어져라 관찰했나.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은 채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그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냉큼 고개를 처박는 것도 모자라 태양을 가리듯 이마 근처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조물주께서 저렇게 한 사람한테 몰빵하셨겠어? 아닐 거야. 저 남자만 아니면 다 괜찮.”
“길제이 씨?”
테이블 아래로 방금 전 보았던 그 다크 네이비 슈트 자락이 보였다.
젠장. 망했어, 망했다고! 길제연 네 이년. 내 너를 용서치 않을 것이야. 저런 무시무시한 남자와 맞선을 보게 한 죄! 돌팔이 점쟁이와 싸잡아 혼쭐을 내줄 게야! 아악!
제연을 단죄하는 건 하는 것이나 지금은 아니다. 제이는 짧게 심호흡을 한 후 얼굴을 갈아 쓰고 그를 향해 고개를 들어올렸다. 죽을 때까지 하지 못할 것 같던, 왼손으로 오른쪽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기는 여우 짓까지 해대며. 내가 길제연 동생이 맞긴 하구나.
“네에! 오셨어요? 제가 바로 그 길제입니다. 앉으세요, 앉으세요.”
남자의 짧은 웃음에 제이는 곧장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의 인사가 평범하지 못했다는, 마치 선거유세를 연상케 했다는 것을.
제이가 고개를 옆으로 꺾고 ‘길제연, 죽여 버리겠어.’ 중얼거리는 동안 그는 여유로운 손놀림으로 재킷 단추를 풀고 의자에 앉았다.
“늦은 것 같진 않은데.”
가볍게 들어 올린 손목 위로 시계가 번쩍였다. 저 모델, 안다. 언니 부탁에 형부 생일 선물 사러 다닐 때 눈여겨봐 뒀던 것들 중 하나이니 모를 리가. 가격이 얼마였더라. 이백? 삼백?
쓰잘 데 없는 생각을 하느라 대답이 너무 늦어졌단 생각에 제이의 행동만 더 오버스러워졌다.
“아니요! 늦긴요. 제가 빨리 도착한 거죠. 늦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언니가 어찌나.”
“쿡쿡. 형수님이요?”
“네? 아, 그게 그러니까…….”
미안하다, 언니야. 잘하기는커녕 아주 초장부터 판 다 깨진 것 같으다.
기하는 당황하는 제이를 재미있다는 듯 쳐다보았다.
아마도 그녀는, 오늘이 네 번째 만남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진을 주고받은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아보았냔 질문을 할 여유조차 없어 보이는 그녀에게, 지난 인연을 일일이 설명하는 건 현명한 짓이 아니란 판단이 섰다.
“남기하 라고 합니다. 나이는 서른넷, 작은 교육재단에 있습니다.”
생각 외로 다정한 그의 음성에도 제이의 삐뚤어진 마음은 좀처럼 착해질 줄을 몰랐다.
작은? 중, 고교에 유치원까지 있는 사립학교 재단이면서 뭐, 작은? 그리고 있습니다는 또 뭐야. 이사님이신 거 다 알거든요?
“아직은 명판뿐인 이사지만 곧 직함에 어울릴 제대로 된 이사가 되겠죠, 아마도.”
“지금도 훌륭하신데요, 뭘.”
“마음에 없는 말, 하지 않는 게 좋겠네요. 너무 표시가 나서.”
어머, 눈치 채셨어요? 제이는 반기며 손이라도 꼭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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