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인했던 기억이 돌아오자, 일식의 인간에 대한 불신은 더욱 깊어졌다. ‘아무리 같은 피를 물려받은 사촌이라지만 배신하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미리미리 단속해야지.’ “일식아. 아니, 아우님. 뭣 좀 물어봐도 돼?” 태식은 일식의 눈치를 살피고는 어렵게 입을 뗐다. “뭐?” “아우님은 왜 이렇게 성실동 사람들을, 수해를 당한 사람들을 돌봐 주고 신경 쓰는 거야?” 태식은 일식이 엄청난 돈을 들여 가면서 수해를 겪는 성실동 주민을 돕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식은 그러는 것도 모자라 그에게 수재민들을 구호하는봉사활동을 하라고 한다. “훗, 우리 형 크려면 아직 멀었네.” 일식은 피식 코웃음을 치며 태식을 보았다. “내가 대가리에 총 맞아서, 돈이 썩어 문드러질 정도로 많아서 사람들을 돌봐 주는 건 줄 알아? 천만에.” 일식은 기름이 묻은 엄지와 검지를 차례로 입에 넣어 쪼옥 빨고는 태식을 향해 오른손 검지를 흔들었다. “그럼?” “내가 돌봐 주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것은, 또 내가 신경을 쓰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내 힘이 세졌다는 거야. 내 힘이 세지면 형한테도 좋은 일이고.” “그렇지. 아우님 힘이 세지면 나한테도 좋겠지.” 일식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좋을 것이 없기에 태식은 일식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맞장구를 쳤다. “훗. 대통령 만드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 총, 칼로 대통령 되는 시대는 이제 끝났다고. 민주주의 시대잖아.” 일식은 이런 태식을 보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 힘이 세지면 세질수록 형이 나중에 대통령 선거에서 이길 확률이 높아진다고.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귀찮아도 얼굴 찡그리지 말고 열심히 하라고. 알았지?” 쓰윽, 쓰으윽. 일식은 태식의 등을 두드리는 척하면서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그의 옷에 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