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팀 직원은 계산대 아래에서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키고 남자의 물건 중, 애완동물용 외날 빗을 가져다 댔다. 단말기 모니터에 새 항목 ‘애완 외날’이라는 이름으로 3천 원의 금액이 올라왔다. 남자는 퍽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 계산된 물건들을 가져온 쇼핑 주머니에 담기 시작했다. 근무 수칙 중에는 고객에게 사적인 질문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묻고 싶었다. ‘당신, 소설가예요?’라고.
--- p.13 「살인자의 쇼핑목록」 중에서
“촉은 교수님이 좋으신 거 같은데요. 작년에 계간지에 발표하신 단편 「월하택시」 읽었어요. 밤마다 귀신을 실어 나르는 택시 기사 얘기요. 이거 혹시 교수님의 자전적 얘기 아닐까 상상해봤어요. 진짜 귀신같은 거 본 적 있으시죠?”
--- p.57 「데우스 엑스 마키나」 중에서
고양이는 덤덤해야 오래 살 수 있다. 쏘나타 주인의 고함에도, 경비원의 빗자루에도, 죽은 엄마의 희뿌연 눈동자에도 놀라선 안 되었다. 하지만 나는 덤덤하지 못했다. 매번 겁에 질려 털을 세우고 호령하듯 울었다. 그때마다 너는 그릉거리며 나를 핥았다.
--- p.105 「덤덤한 식사」 중에서
“쌤, 러닝패밀리 캐릭터가 죽으면 그 숫자만큼 사람이 사라진 대요. 그래서 우는 거예요, 주하.”
굵은 헤어롤을 앞머리에 만 주하 앞자리 아이가 말했다. 아이들이 울상을 지으며 웅성거렸다.
“너희 그런 도시 괴담을 믿니? 우리나라 한 해 실종자 수가 몇 명일까? 자그마치 10만 명이야. 너희가 그 게임을 하기 전부터 그랬어. 매년 세종시 인구만큼이 사라졌다 대부분은 제자리로 돌아와. 웃음밖에 안 나온다, 얘들아. 너희 중 이 게임 안 하는 사람은 없니?”
--- p.119 「러닝 패밀리」 중에서
‘지난번엔 말로 태어났다고. 경마장 알지? 게으른 기수를 만나 이가 득실대는 우리에 사느라 무척 괴로웠지. 파보 장염에 걸린 탓에 5년도 못 살고 죽어서 고양이로 다시 태어난 거야. 어쩌면 다음번에도 사람으로 환생하지 못할지도 몰라. 근데, 넌 어떤 사람이었어?’
나는, 어떤 사람이었던가? 수학여행비를 마련하기 위해 몰래 바이트를 하는 국어 교사였다고 말하고 싶진 않았다. 그땐 아니었지만, 지금은 후회로 남은 기억이다.
‘뇌졸중으로 죽은 것 같아. 죄 많은 남자였어.’
분명 나는 죄 많은 남자였다. 마흔두 명의 목숨을 지키지 못한.
--- p.172 「용서」 중에서
“자, 판타지적인 가정을 하나 해봅시다. 어느 날 갑자기 개들 이 말을 할 수 있게 됐다고 치자고. 말이 그냥 목소리가 아닌 건 알죠? 개들이 인간과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지능도 올라가면서 자기들 권리도 주장하게 된 거지. 그럼 여기서 어떤 문제가 생길까? 그렇지, 우리 태현 회장님이 정확히 짚었네. 그들이 인권을 주장한다면, 인간은 개를 동등한 존재로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지 윤리적, 사상적 관점을 갖고 토론해봅시다. 결과 보고서는 조장이 취합하면 되고 말해두지만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참신성이에요. 하지만 생각 없이 뇌피셜로 제출하면 과감하게 점수가 2점으로 나간다는 거 잊지 말기.”
--- p.194 「어느 날 개들이」 중에서
그 시각, 각시는 온 마을을 뛰어다니며 보따리에서 꺼낸 색색의 사탕을 곳곳에 놓아두었다. 아이들이 자주 모여 노는 개울가 큼직한 바위 위, 뒷산 아래 으슥한 방앗간 앞, 청년들이 자주 모이는 우물가 평상, 출타 중인 이장네 대문간에 사탕이 놓였다. 그 이튿날, 사탕은 모두 사라졌다. 단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아이들과 남몰래 방앗간에서 정분을 나누던 처녀와 총각, 지게를 내려놓고 평상에 모여 땀을 식히던 청년들과 임신한 이장네 맏며느리가 배앓이를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 p.236 「각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