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자주 꾼 꿈이 있습니다. 프랑스 작가 쥘 베른Jules Verne(1828-1905)이 쓴 『15소년 표류기』에 나오는 슬라우기Slaugi호 같은 범선을 타고 태평양을 항해하며 무인도를 탐험하는 꿈이었죠. 지금도 가끔씩 그런 범선을 타고 항해하는 꿈을 꿉니다. 3년 전 멕시코 해군 훈련선인 범선 꾸아떼목호가 인천에 왔을 때도 한걸음에 달려가 구경하면서 “이 배를 타고 저 큰 바다들을 누비고 싶구나!”라는 생각을 했죠. 하지만 이제는 슬라우기호나 꾸아떼목호 같은 범선을 타는 꿈보다 더 근사한 꿈들을 많이 꿉니다. “모든 국민을 고귀한 인격체로 끌어올리는 의로운 정치, 선지자의 음성 같은 설교가 울려 퍼지는 교회, 19금 본문도 제대로 살려낸 성경 번역, 인간다움을 지향하는 인문 정신이 살아 있는 세상”을 소망하는 꿈들을 꾸죠. 이 책은 그런 꿈들을 스물네 꼭지 이야기 속에 담아놓은 꿈 덩어리입니다. --- “독자 여러분을 맞이하며” 중에서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번역자는 죽어서 번역 작품을 남긴다.” 제가 절반은 지어낸 말이지만, 사실 맞는 말입니다. 번역자가 이 세상을 떠나도 번역 작품은 그대로 남으니까요. 번역자가 남기고 간 번역 작품에는 그 이름이 남고 번역자의 성품과 생김새를 그대로 보여주는 번역자의 문체가 그대로 남습니다. 그래서 번역가 이윤기 선생(1947-2010)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번역한 『그리스인 조르바』나 『장미의 이름』에는 이윤기라는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고 그의 번역 문체가 남아 있습니다. 번역가 이윤기가 남긴 유려한 번역문 덕분에 우리는 세상사에 도통한 혀 놀림으로 인생 훈수를 늘어놓고 나이든 여인네를 꼬드겨 자기 육욕을 채우는 인간 조르바(그리스어 원서에서는 “조르바스[조름바스]Ζορμл??”)를 옆에 있는 것처럼 느끼고, 막힘없는 지혜와 통찰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수도사 윌리엄(이탈리아어 원서에서는 “굴리엘모Guglielmo”)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번역자는 떠났지만 그가 남긴 번역 작품은 늘 우리 곁에 남아 영원히 살아 있는 조르바와 윌리엄 이야기를 들려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