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고스란히 당하고 있었던 거야. 제일 처음 마주쳤을 그 순간부터 말이네. 이 사건에서 내가 진짜로 담당한 역활이 무엇인지 아는가? 하긴 그들이 계산적으로 내게 위임한 역활이지만 말이야...... 그건 다름 아닌 앙드레 브로포드, 바로 그 역활이었어! 그래, 정말이지 귀신 곡할 노릇이었다구! 나중에, 신문을 보고, 이런저런 사항들을 꼼꼼히 따져보고서야 나는 그 사실을 깨달았네. 내가 마치 큰 은혜라도 베푸는 사람인 척, 위험을 무릅쓰고 위기에 처한 피해자를 구해줄 때, 그는 나를 브로포드 가문의 일원인 것처럼 둔갑을 시켰었단 말이야...... 정말 대단하지 않나? 자기 집 3층에 살고 있는 그 괴팍한 인물, 무식하고 거친 인물은 누가 봐도 영락없는 브로포드 가문이고, 바로 그 브로포드는 다름 아닌 나였던 거야! 당연히 내 덕에, 그러니까 브로포드가 한 집에 저리도 사이좋게 살고 있다고 하니, 은행가들은 돈을 빌려주려고 줄을 섰을 테고, 공증인들도 고객들의 돈을 마구마구 끌어다댔을 것 아니겠는가! 아..... 정말이지 내가, 이 아르센 뤼팽이 그때 그 부부에게 톡톡히 한 수 배운 셈이었다구!'
--- p.200
우리 시대 최고의 형사인 가니마르와 더불어 파란만장한 사생결단을 치른 바 있는 그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 말이다! 성채나 호화살롱만을 턴다는 황당무계한 신사, 아르센 뤼팽..... 어느 날 쇼르만 남작의 저택을 파고들었다가 빈손으로 나오면서 이렇게 적힌 멋진 메모 한 장을 남겼다지.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
진품이 제대로 갖춰지면 다시 방문하겠음.
운전기사에서 테너가수로, 마권업자에서 양가집 도련님으로, 청년에서 노인으로, 마르세이유의 떠돌이에서 러시아인 의사로, 다시 에스파냐의 투우사로 종횡무진 천의 얼굴을 가졌다는 바로 그 남자, 아르센 뤼팽!
--- p.7
두 번을 겅중겅중 뛰어 놈에게 달려들었는데, 마침 손에 쥔 총을 막 발사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간발의 차이로 먼저 놈을 땅에 패대기친 다음, 나는 전광석화처럼 몸을 날려 놈의 가슴팍을 무릎으로 내리눌렀다.
'이것 보게나, 풋내기! 나는 아르센 뤼팽이다. 지금 당장 내게서 가져간 손가방하고 부인의 물건들을 순순히 내놓는 게 좋을 거야..... 그러기만 하면 내 너를 경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줄 뿐만 아니라, 내 친구로 삼아주지. 자, 어서 말해, 좋아, 싫어?'
녀석은 낑낑대며 중얼거렸다.
'조, 좋습니다....'
'그래야지, 오늘 아침 자네 솜씨는 그런대로 괜찮았어. 내 인정하지.'
그제서야 나는 압박을 풀고 일어섰는데, 놀랍게도 녀석은 호주머니에서 칼을 빼내 후닥닥 들이대는 것이었다.
'멍청한 녀석!'
나는 한손으론 놈의 공격을 막아내고 다른 한손으론 경동맥이 몰려있는 급소부위를 냅다 가격했다. 물론 상대는 허수아비처럼 그 자리에 벌렁 나자빠지고 말았다.
--- p.107
너무나도 뜻밖의 만남인지라, 두 사람은 서로의 출연에 똑같이 혼비백산한 것처럼 아무 말도 못한 채 붙박힌 듯 서있었다. 하필 이런 장소에서 이런 시간에 마주치다니…
마침내 감정이 복받치고 다리가 후들거리는지, 넬리 양은 옆의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남자는 그냥 서있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의 뇌리에는, 온갖 잡동사니들을 한아름 안고, 호주머니마다 불룩한 데다, 터질 듯 팽팽한 자루를 둘러맨 자신의 모습이 이 여인에게 어떤 인상을 주고 있을지 서서히 감이 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혼란이 그의 내부로 물밀 듯 밀려왔다. 영락없는 현행범으로 발각된 험상궂은 도둑놈의 모습… 아르센 뤼팽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고 있었다. 사정이야 어찌됐든, 그녀에게는 그저 도둑의 모습에 불과하리라… 남의 호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남의 집 문을 슬그머니 따고 드나드는, 그런 모습 말이다…
시계 하나가 바닥 양탄자 위로 굴러 떨어졌고, 또 다른 시계도 떨어졌다. 이어서 이것저것 귀금속들이 팔 사이로 마구 떨어지는 걸 사내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문득 어떤 결심이 섰는지, 사내는 들고있던 물건부터 안락의자 위에 내려놓았고, 호주머니를 비웠으며, 매고있던 자루까지 내려놓았다.
이제야 넬리 양 앞에서 조금 느긋해진 기분이었다. 그는 말이라도 나눌 생각으로 성큼 다가갔다. 하지만 그녀는 멈칫하는가싶더니, 겁에 질린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살롱 안으로 달음질쳐 들어가는 것이었다. 사내도 물론 뒤따라 들어갔다. 아뿔사, 거기에도 역시 텅텅 비다시피 한 썰렁한 현장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넬리 양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부들부들 떨며 텅 빈 공간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사내가 다짜고짜 입을 열었다.
"오후 세시까지 모든 걸 제자리에 돌려놓겠습니다…"
그녀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는 다시 반복했다.
"정확히 세시까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세상이 두 쪽 나도 약속은 지키겠습니다… 오후 세 시까지…"
--- pp.238-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