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랑은 줄줄이 이어지는 우발적이고, 가슴 짠하고, 우스꽝스럽고, 관능적인 이 생각들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는 말하자면 보라색 핸드백을 든 여자의 영혼 속으로 들어가는 문을 하나 열어젖힌 셈이었다. --- p.42
그 여자는 무척이나 과거에 집착하는 여자야, 이 거울만 해도 아주 오래된 거잖아, 가족의 추억이 깃든 물건. 어쩌면 할머니한테 물려받았을지도 모르지. 향수도 그래, 일반적이지 않아. 요즘 아바니타 같은 향수를 쓰는 여자가 어디 있어? 그리고 그 여자는 수첩에 아주 놀라운 문장들을 적어 놓았어, 게다가 아빠가 존경하는 작가의 사인도 받았잖아……. 요컨대 아빠에게 딱 어울리는 여자라는 거지. 클로에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마쳤다. --- p.89
그걸로 끝이었다. 누군가의 삶에서 어쩌면 그리도 쉽게 사라져 버릴 수 있을까? 하긴 누군가의 삶에 들어갈 때도 그에 못지않게 쉬웠지. 우연, 어쩌다 주고받은 몇 마디 말 같은 것이 지속적인 관계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우연한 사건, 주고받은 몇 마디 말이 그 같은 관계의 끝이 되고 말았다. --- p.113
그는 거실로 가서 남의 집에 몰래 숨어들어 와 잠시 그곳에 머무는 사람답게, 아니 그보다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실내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런데 어떤 곳에 있게 된 것이 너무도 생경해서 정신이 무슨 마술 같은 조화를 부리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그런 장소들, 이건 절대 현실이 아니라 몽상이며, 이제 곧 그 몽상에서 깨어날 거라고 믿을 수밖에 없는 장소들이 있다. 마치 자기가 아닌 또 다른 로랑이 존재한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 p.151
집으로 돌아왔을 때, 로랑은 자신의 아파트가 전에 없이 이상하게 텅 비고 쥐 죽은 듯 고요하게 느껴졌다. --- p.161
쉰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서점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로랑에게 다가왔다. 『가능한 것에 대한 향수』가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로랑이 대답했다. 로랑이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손님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곧 가져다 드리죠. 안토니오 타부키가 페소아에 대해 쓴 책이었다. 하지만 로랑의 귀에 들어온 것은 한낱 책의 제목이 아니라 바로 그 질문, 처음 보는 남자가 던진 그 질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질문에 진솔하게 대답했다. 네, 있습니다. --- p.190
곁에 두고 지나치는 동시에 매우 가까이 다가갔기 때문에, 최면에 가까운 멜랑콜리의 순간에 놓이게 될 때면 이따금 그 가능한 것의 파편이나마 움켜잡을 수 있다. 아주 먼 곳에서 송출되는 라디오 주파수를 잡는 것과 같은 이치다. 메시지는 희미하지만, 유심히 귀를 기울이면 일어나지 않은 그 삶의 노래 한 토막이 들리기도 한다. 한 번도 입 밖에 내어 본 적이 없는 문장이 말이 되어 나오는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장소에서 내딛는 발자국 소리를 듣기도 한다. --- p.193
핸드백에 생각이 이르자 로랑은 의자를 뒤로 물린 후 서점 앞 공원을 응시한다. 우리가 보는 현실이란 따지고 보면 우리 눈 깊숙한 곳에 새겨진 수학 공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로랑의 눈엔 공원의 철책도 나무들도 조각상도 들어오지 않는 걸 보니 그렇다. 그의 정신은 이미 딴 데 가 있다. 그의 정신은 어느새 로르의 집으로 달려간다.
--- p.193~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