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치미] 역시 정답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각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자리였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가 모이니, 정답은 아니더라도 살아가는 지혜 같은 게 보였다. 특히 인생 산전수전 공중전을 겪으신 분들의 이야기에는 돈 주고 살 수 없는 귀한 경험과 깨달음이 존재했다. 마음을 따스하게 머리를 선명하게 해주는 무엇인가가 항상 있었다. 녹화가 끝나고 나면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귀한 보석 하나 가슴에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망설이다 출연하신 선생님들이 [동치미]에 무한 애정을 주실 때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분들도 나처럼 살아가는 지혜를 얻었노라 말씀하신다.
--- 「들어가는 말」 중에서
제가 위장장애가 왔었는데 왜 왔는지는 모르겠어요. 제 몸무게가 50킬로그램에서 45, 43, 40이 되는 동안에 어머님이 처음에는 말씀을 안 하시더라고요. “어머님, 제가 위장장애가 와서 몸이 많이 말랐어요”라고 제가 먼저 말씀을 드렸어요. 친정엄마 같았으면 먼저 말을 하셨겠지만, 시어머니니까 어느 정도 선이 있고 벽이 있나 보다 생각했어요. 근데 어느 날 시어머님이 먼저 전화를 하셔서 그러시는 거예요. “애미야, 네가 그렇게 아픈 게 혹시 나 때문이 아니니” 하시면서 “내가 미안하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제가 그 순간……그동안 살면서 어머니에 대한 섭섭함, 터놓지 못했던 그런 순간들이 왜 없었겠어요. 너무 많았죠. 근데 어머니가 저한테 먼저 손을 내미셨어요. 그 한마디에 저는 정말 모든 쌓였던 마음이 사라졌어요.
--- 「시어머니와 며느리」 중에서
청국장 명인 서분례 선생님을 섭외하러 찾아뵌 적이 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에 서분례 선생님도 자신의 엄마에 대한 얘기를 해주셨다. “우리 엄마가 암 수술을 했는데, 우리 애들 바닷가에 놀러간다고 엄마를 데리고 간 거야. 애들이 노는 거 좋아하니까 우리 엄마 점심을 못 먹이고 바닷가에서 놀았어. 우리 애들이 더 중요해서. 오후 늦게 되서야 밥 한 그릇 사드렸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가장 후회돼요. 왜 그랬을까. 우리 엄마 점심을 먼저 챙겼어야 했는데. 살아계실 때 잘하세요.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면 못 해드린 것만 생각나요.” 편찮으셨던 엄마 점심을 제때 못 챙겨드린 게 가장 후회된다며 눈물을 훔치셨다. 일부러 안 챙긴 것도 아니고 어린 자식들 보다가 조금 늦어졌던 것뿐인데, 그 순간이 가슴에 멍울지신 거다. 얘기를 듣는데 같이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서분례 선생님의 무수한 좋은 말씀 중에 유독 이날 이 얘기가 가슴에 박혔다. 방송에 나와서 하신 얘기도 아니고 인터뷰도 아니었다. “살아계실 때 잘하세요.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면 못 해드린 것만 생각나요” 하시는데 새삼스레 뇌리에 박혔다. 부모님 살아계실 때 잘하라는 얘기는 무수히 들었지만, 때늦은 점심 한 끼가 부모님 돌아가신 후에 저렇게 마음이 아플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 「미안한 부모 후회하는 자식」 중에서
그러니까 사람이 뭘 감추면 안 돼. 마음에 감춤이 없이 탁 터놓고 얘기하면 공감대가 형성돼. ‘너도 나랑 똑같구나’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동질의식을 느끼고 친구로 생각해. 그래서 내 말을 받아줘. ‘아, 저 여자가 거짓말하지 않는구나’, ‘괜히 얘기해서 자기를 승화시키려는 게 아니구나’, ‘내 친구 맞다’ 하면서. 그래서 친구가 된 거지. 그렇기 때문에 괜히 신성일도 들먹이고 그랬지, 하하하. 근데 부인들은 남편을 칭찬하는 사람이 100명 중 4명도 안 돼.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공감대를 형성한 거지. 사람들은 잘난 체하고 다른 사람은 놋숟가락으로 먹으면 우리는 금수저로 먹는다 하면서 자기 사생활에 금칠을 하려고 많이 그러잖아. 근데 난 금칠을 벗겨버렸어. 놋숟가락은 아무데나 굴러도 막 씻고 푹푹 닦아서 놓으면 그게 외려 더 깨끗하더라고. 난 그런 식으로 살아. 요새도 그래.
--- 「엄앵란 선생님 인터뷰」 중에서
저희는 진정한 의미의 스몰웨딩을 했어요. 되게 늦게 결혼했고 부모님이 편찮으신 것도 있고 해서 150만 원으로 결혼식을 했어요. 집도 저희 집이 1, 2층으로 된 주택인데 아버님 집 2층에서 살아요. 저는 원래 독신주의자였기 때문에 그 2층 집을 제 위주로 다 꾸며놨었어요. 제가 살던 그 2층 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는데, 아내가 처음에는 굉장히 불편하다고 했어요. 그래서 아내에게 제가 하나씩 하나씩 장만하면서 집을 만들어가자고 그 재미도 있을 거라고 얘기했어요. 그 다음부터 집에 뭔가 하나씩 생기기 시작하는 거죠. 장롱이 바뀌고 냉장고도 바뀌고 처음에는 굉장히 좋았어요. 뭔가 새로운 것들이 집에 쌓여가잖아요. 근데 결혼하고 6개월, 8개월 정도 됐을 때 술 한 잔 먹고 새벽에 들어갔는데 우리 집이 아닌 거예요. … 뭘 좀 하려고 하면 옆에서 달그락달그락거리고 뭐 좀 찾으려고 하면 없고.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서 아내에게 밤 12시쯤에 나가서 생각을 하고 오겠다고 했어요. 요새 24시간 하는 카페들이 많잖아요. 저는 말릴 줄 알았는데 나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나갔죠. 나가서 카페에 앉아서 노트북을 하나 두고 생각도 하고 밖에 나가서 바람도 쐬고 했는데 그 시간이 너무 행복하고 거기가 나만의 오롯한 공간이 되는 거예요.
--- 「결혼이란 대체 뭐죠?」 중에서
이혼을 안 해봤으면 말을 말아요. 이혼을 우리가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 자체는 상당히 신중한 거고, 미래의 불안감과 모든 게 내포된 거거든요. 진짜 이혼하고 싶은 사람은 이혼 생각 안 해요. 진짜 이혼하고 싶은 사람은 ‘재산을 절반 줘야 하나’, ‘저 인간이 뭐가 있는지 조사해 봐야 하나’ 이런 생각 안 해요. 이혼이라는 것을 여자가 선택했을 땐 정말 살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이놈하고 살아서 죽고 싶다가 아니라 이놈과 살면 나도 죽고 애들도 죽으니까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살고 싶다는 절박함 때문에 이혼하는 거예요. 성격 차이로 이혼한다고요? 성격이 안 맞는다고 가족이 다 찢어져야 해요? 남들이 먹고 살 만하니까 이혼하지? 천만에, 먹고 살 만하면 이혼 잘 안 해요
--- 「이혼은 살고 싶어 하는 거예요」 중에서
우리 어머니는 36살에 혼자가 되셨어요. 그래서 어머니는 1남 4녀를 키우기 위해서 뭐든지 하셔야 했어요. 그러면서 혈압으로 두 번인가 쓰러지셨어요. 병원에 입원하고 주사를 맞아야 하는데 자식들 먹여 살리느라 시간이 없으신 거예요. 그냥 견디시는 거예요. 그렇게 시간이 쭉 지나고 제가 20대 중반에 배우가 되면서 돈을 많이 벌어서 가장이 됐어요. 너무 행복했어요. 근데 어느 날 갑자기 전화가 왔어요. 엄마가 앰뷸런스에 실려 가셨다는 거예요. 가보니까 엄마는 체한 것 같다고 괜찮다고 하시는 거예요. 근데 의사 선생님이 저를 불러요. 급성 심근경색인데 몸 상태가 너무 안 좋다고 관리를 어떻게 했냐고 하시는 거예요. 동의서를 쓰고 엄마를 보러 갔는데 엄마가 이미 혼수상태인 거예요. 계속 안 깨어 나셔서 물어보니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라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습니다, 기적밖에 없습니다”라고요.그때 한강에 나가서 뚜벅뚜벅 걸으면서 기도를 하는데, 추운지도 몰랐어요. 저는 총각이었고 ‘엄마를 데려가시면 저도 같이 갑니다. 저의 희망은 어머니였고 엄마가 힘들게 사는 게 싫어서 돈을 벌었는데 엄마가 안 계시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엄마가 돌아가시면 저도 죽습니다’ 제가 까무러치기 전까지 기도만 했어요. 그 뒤 한 달 반 만에 기적이 일어났어요. 엄마가 깨어나셨어요. 재활치료를 마치고 정확하게 3개월 만에 돌아가실 분을 일반병실로 옮겼어요. 그때 제가 생각한 게 뭐냐면 엄마를 병원에 보내야 하는데 가기 싫어하신단 말이에요. 엄마가 항상 걱정하신 게 뭐냐 하면 “우리 창훈이가 번 돈은 못 쓰겠다”예요. 그때 마침 엄마가 물어보셨어요. “창훈아, 얼마 들었어?” 솔직히 그때 한 4천만 원 가까이 들었던 것 같아요. “엄마 1억 들었어” 했어요. 그 당시 1억이면 엄청난 돈이잖아요. “미안해서 어떡하니” 하시는데 “그니까 엄마, 미안해하지 말고 병원을 자주 가자” 그랬어요.
--- 「돈은 쓰는 자의 것이다」 중에서
태어난 지 백일이 되기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당시 2남 3녀였는데 아버님께서 혼자서 5명을 다 케어할 수 없어서 뿔뿔이 흩어졌어요. 제가 큰 고모, 작은 고모집을 왔다 갔다 하다가 혼자 된 게 중학교 2학년이었어요. 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때 학교를 어떻게 다녔냐 하면 아파트 옥상에서 자고 연립주택 지하 보일러실에서 잤어요. 밤새서 새벽까지 걷다가 새벽 3시쯤 학교에 일찍 온 것처럼 교실에서 자고 그랬어요. 그때 한 생각이, ‘내가 돌아갈 수 있는 곳, 여행을 해도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였어요. 96년도 20대 때 보증금 30만 원에 8만 원짜리 방을 얻었어요. 태어나서 처음 얻은 거예요. 시장에서 삼거리 골목에 이 집만 돌출되어 있어서 쌌어요. 문을 열면 바로 내 방이 나와요. 하루는 유람선 공연이 있어서 아침 일찍 나가서 밤에 늦게 돌아왔어요. 유람선 다 돌고 지쳐서 새벽 2시쯤 왔는데 집이 없어졌어요. 내가 술 취해서 안 보이나 해서……슈퍼, 세탁소, 닭집, 다 있는데 우리 집만 공터야. 내가 지금 술이 취했나 하고 다시 밑으로 내려갔다가 올라왔어요. 여전히 없어요, 우리 집만. 근데 여기서 눈물이 줄줄 나요. 친구에게 전화해서 “나 집이 없어졌어” 했더니 친구가 술 취했으면 그냥 자라고 하더라고요. 눈물이 완전 통곡이……아침까지 거기서 계속 울었어요. 그전에도 잘 데는 없었는데 여전히 내 인생은 ‘대체 왜 이런 거지’ 해서 눈물이 줄줄 나요. 아침에 가보니 보상금 때문에 이 집을 철거한다고 했대요. 근데 집주인이 나한테 말을 안 해준 거였어요. 또다시 잠잘 데 없는 인생을 살았어요. 38살 될 때까지 잠 잘 곳 걱정 없던 군대 30개월이 가장 편했습니다. 재워주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너무 좋았어요. 37살에 운 좋게 영화와 방송에 캐스팅이 되어 38살에 처음으로 나의 공간, 돌아와서 잘 수 있는 공간, 부엌 하나 있는 단칸방을 얻었어요. 그 뒤로 일을 열심히 하고 아내를 만나서 집을 샀어요. 내가 만들어놓은 공간 안에 우리 가족이 모두 모였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어요. 내 인생 중 지금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에요.
--- 「집 걱정 없이 살고 싶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