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죽이 죽은 뒤 홍랑은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모든 치장을 금하고 스스로 곱고 고운 얼굴을 상하게 한 후 그의 무덤에서 시묘살이를 했다. 홍랑의 이런 사랑이 하늘을 감동시켰는지 홍랑이 죽고 난 뒤 해주 최씨 문중에서는 비록 천민의 신분이지만 그녀의 헌신적인 사랑에 감동하여 한 집안 사람으로 여겨 장사를 지내주었다. 지금도 경기도 파주시 교화면에 있는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바로 아래에 홍랑의 무덤이 있다. 6개월 남짓한 짧은 기간이었지만 홍랑의 그 뜨겁고 감동적인 사랑은 400년이 지난 세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렁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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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답사 1번지’라는 말은 그냥 붙여진 말이 아니다. 강진은 말 그대로 발길 닿는 곳이 문화유적이요, 관광지인 고장이다. 소중한 문화유산, 수려한 산, 맑고 깨끗한 강과 바다, 기름진 들녘, 후덕한 남도의 인심이 어우러진 강진은 예로부터 ‘남쪽의 낙원’이라 일컬어져 왔다. 월출산과 탐진강, 무위사와 백련사, 월남사지3층석탑과 금곡사3층석탑, 다산초당과 김영랑 생가, 고려청자문화의 발상지와 칠량의 옹기를 비롯해 병영의 전라병영성, 옴천의 토하젓, 탐진만의 갯벌도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다. 특히 잔잔한 바다의 물결과 어우러진 강진읍, 칠량면, 대구면, 마량면 해안 풍경은 카메라를 들이대면 그대로 한 폭의 수채화로 인화된다. 그때가 봄이라면 영랑이 읊조렸듯 “찬란한 슬픔의 봄”을 만날 수 있다. 탐진만의 갯벌은 넓고 깊어 해산물이 많이 생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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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두 개의 연륙교를 건너야 한다. 다리는 육지와 섬, 섬과 섬을 연결하며 해남땅 남창에서 달도를 거쳐, 완도땅 원동으로 이어진다. 완도 여행은 이렇게 두 개의 다리를 건너면서 시작된다. 남도의 서남쪽 끝자락에 자리를 잡고 있는 완도군은 203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졌다. 이곳에서 섬은 흔하디흔한 것이다. 고개만 돌려도 복병처럼 숨어 있던 섬들이 불쑥불쑥 얼굴을 내밀고 달려든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한 뼘의 수평선도 가지지 못한 바다는 그렇게 섬을 끌어안고 사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지도 모를 일이다. 바다는 속살을 드러낸 섬들의 몸뚱어리를 어루만지듯 연신 출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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