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교 첫날, 강당에 모인 우리는 한 명씩 앞으로 나가 지금껏 살아온 이야기를 짧게나마 나누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들어온 사람, 명문대를 다니다 온 사람, 중소기업을 전전하다 온 사람, 아기 엄마, 소녀 가장, 단편영화 감독, 국가대표 운동선수 등 다양한 사연을 가진 여성들이 자기 이야기를 수줍게 그러나 거침없이 쏟아냈다. 한 명씩 발표를 마칠 때마다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여성도 저렇게 다채롭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고향도, 나이도, 경력도, 성격도 모두 제각각인 여성들이 경찰 동기라는 이유 하나로 똘똘 뭉치는 모습은 얼마나 큰 울림을 주던지! ‘개인’이던 여성이 하나의 공통점으로 ‘우리’가 되자 세계는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 「다시 만난 세계」 중에서
사랑하는 언니들과 동유럽의 작은 식당에서 저녁으로 닭고기와 맥주를 먹으며 웃고 떠드는 일 같은 건 비루하기만 했던 내 인생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을,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에피소드인 줄 알았다. 이문세의 [알 수 없는 인생]이라는 노래 제목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살아 있길 잘했다. 죽지 않아서 다행이다. 죽고 싶던 숱한 날이 떠올랐다 스치듯 사라졌다. 내 방 깊숙한 곳에 처박아둔 오래된 유서가 남의 것처럼 느껴졌다. 처박아둬서 다행이다. 누군가에게 읽히지 않게 내가 버티고 있어서, 그래서 너무나 다행이다.
--- 「마뉴팍투라 군단」 중에서
남성 비율이 90퍼센트 가까이 차지하는 경찰 조직 내에서도 유독 성비 불균형이 심한 부서가(사실 어디든 그렇지만) 형사팀과 과학수사팀이다. 그 안에서 단순히 개인적인 친분을 넘어 각자의 목표를 가지고 자리 잡기 위해 노력하는 여성 동료로서도 언니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다. 보다 더 거칠고 궂은 일 많은 형사팀 내에서 고군분투하며 여기저기 쓸리고 상처 입고 있는 언니가 지지 않았으면. 늘 그랬듯 호탕하게 웃으며 멋진 해답을 도출했으면.
--- 「오, 나의 시벨」 중에서
남자친구나 남편이 아니라 나 자신이 직접 운전하는 차로 원하는 곳을 원하는 시간에 가보는 경험이 여성들에겐 꼭 필요하다. 언제 떠나서 얼마나 머물다 돌아올 건지, 빠른 고속도로로 갈 건지 느긋하게 국도로 갈 건지를 자유 의지로 결정하고, 문득 경치 좋은 곳을 만나면 차를 세워 풍경을 바라보는 경험은 삶을 좀 더 풍부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운전은 기술이고, 기술은 갈고닦는 사람을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 「운전의 기술」 중에서
체즈 언니는 인기를 얻기 위해, 그리고 그 인기를 누리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쇼트커트에 교복 바지를 입고 다녔던 언니는 객관적으로 봐도 잘 생긴 얼굴에 유쾌한 성격, 더불어 우수한 학업 성적까지 삼박자를 넘어 구박자쯤 갖춘 완전체였다. 이런 언니가 행차하는 곳은 언제나 여자 아이들의 비명 소리로 가득했다. 춤 잘 추는 댄스부 주장인 데다가 피아노 연주 실력까지 수준급이어서, 드라마 속 주인공도 이 정도면 설정 과다로 비난을 받을 캐릭터였다.
--- 「모두의 아이돌」 중에서
나는 하버 언니보다 먼저 합격했다. 함께 공부하던 이들이 대부분 합격한 뒤 자습실에 혼자 남게 된 하버 언니의 책가방은 더욱 무거워져서 가방끈이 가방 무게를 감당하는 게 불가능해 보였고, 체구가 작은 언니가 걸어갈 때면 사람이 걸어가는 건지 책에 잡아먹힌 건지 분간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나의 합격 소식을 듣고 언니는 책상을 쾅쾅 두드리며 욕을 내뱉었을까.
--- 「(언)니가 뭔데」 중에서
강 언니는 180센티미터 가까운 키에 건장한 체격, 커다랗고 아름다운 손을 가진 사람이었다. 배구 선수 김연경을 떠올리게 하는 리더십과 타인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행동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는 사람. 그러나 언니가 마냥 강하기만 한 사람이었다면 이토록 잔상이 진하게 남진 않았을 것이다. 언니에게는 선한 사람한테서 느껴지는 특유의 슬픔 같은 게 있었다. 늘 슬픔을 껴안고 사는 사람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을 쉬이 알아본다.
--- 「강 언니」 중에서
언니는 나에게 있어 자매와 부모, 그 사이 어디쯤의 존재였다. 두 분이 오빠를 돌보느라 바쁜 탓에 집에는 늘 커다란 구멍이 있었으니까. 어쩌면 언니와 나는 함께 그 구멍을 메우려 노력한 전우와도 같다. 집안의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 늘 촉각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부모님의 신경이 자신에게까지 오지 않도록 노력하는 데 학창 시절의 대부분을 할애했다.
--- 「태초에 언니가 있었다」 중에서
한평생을 희생만 한 탓일까. 이모는 사십대 초반에 위암 3기 판정을 받았다. 억척스럽기가 들판에 피어난 쐐기풀보다 더했던 이모가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이다. 자식 셋이 나란히 초, 중,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이었다. 이모는 의사에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엄마를 찾아와 암보험 진단금 전액을 건넸다. 내가 아파보니 아픈 자식을 키우는 네 마음을 이제야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고, 너무 늦어 미안하다면서. 엄마는 그날 아주 펑펑 울었다. 이모도 같이 울었다.
--- 「엄마의 언니」 중에서
하루는 지방청 사이버 수사팀 소속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최근 성착취물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관련 수사를 한창 벌이고 있는데, 압수된 동영상을 보는 일이 너무 고역이라며 하소연을 했다. 대부분의 영상에서 기저귀를 한 여자아이가 나온다고 했다. 언니는 믿기 힘든 역겨운 현실에 대해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상대 남성은 청년부터 할아버지까지 다양하단다. 수사를 위해 매일같이 수백 편의 영상을 봐야만 하는 언니는 늘 속이 메스껍다고 털어놓았다. 현실은 언제나 상상보다 곱절은 더 끔찍하다.
--- 「조심히 가」 중에서
경찰관으로 일하면서 많은 여성 피해자를 만났다. 폭력을 당하는 여성, 스토킹을 당하는 여성, 불법 촬영을 당하는 여성, 당하고 당하다 결국 죽임까지 당하는 여성. 여기서 말하는 여성은 신생아부터 고령의 노인까지 모두 해당된다. 이들은 그저 운이 없었던 걸까. 운 없는 사람이 얼마나 더 나타나야 세상이 바뀔까. 바닷가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여성의 시신이 떠오른다. 운 없는 ‘사람’이 아닌 운 없는 ‘여자’가 아무리 많이 나타난다고 한들 세상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 「살아남은 언니들에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