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는 유럽을 많이 다녔습니다. 유럽은 서구문명의 태동을 이룬 현대사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번엔 그 반대편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 때만 해도 북아프리카에 로마 유적이 그렇게 거대하게, 또 광대하게 존재할 줄은 몰랐습니다. 또 여행을 준비하면서 그 나라들이 오스만투르크라는 이슬람 제국과 가톨릭을 앞세운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였음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문득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비주류’라는 단어입니다. 이런 표현을 써도 될지 몰라도, 세계 역사의 변방인 셈입니다. --- p.6
우리나라 처지와 비슷하다는 동류의식 때문인지... 마그레브가 친근하게 느껴졌고, 많은 의문과 고민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거창하게 얘기한다면 오리엔탈리즘의 문제였고... --- p.7
국내에 마그레브 지역을 통틀어 두루 섭렵한 기행문이 아직 없었으니, 미지의 땅에 대해 처음 물꼬를 텄다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이것은 소박한 시작입니다. 우리 안의 편견과 불균형이 문제입니다. 폐쇄성과 편파성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느끼고 싶었습니다. 많은 것을 버리고 개방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고 느끼는 것이 개방과 균형의 시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북아프리카 지중해를 보면서 협력과 공존의 논리도 배웠습니다. 로마가 ‘우리들의 바다’라고 주장했던 그 옛날의 지중해가 아니었습니다. 누구 하나가 독점할 수 있는 시대는 벌써 지나가고 없습니다. 지중해는 이미 다양성과 나눔의 키워드가 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따뜻한 심성과 배려의식이 돋보이는 마그레브 사람들의 마음을 지중해는 꼭 닮았습니다. --- p.10
튀니지 편
지중해 바닷물 전체가 완전히 바뀌는 데는 70년이 걸린다고 한다. 지중해물을 한번 만져보고 70년 후에 와서 다시 만지면, 그것은 그때의 물이 아니고 이전에 흑해나 대서양에서 흘러들어온 물이라는 얘기다. --- p.49 <리바트에서 지중해와 처음 만나다>
리비아 편
이들(반달족)은 가는 곳마다 심한 파괴와 약탈 행위를 벌여 ‘반달리즘’이란 용어를 낳았다... 이곳은 말이 카르타고 유적이지, 순수한 카르타고 유적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유적과 유물 대부분이 로마시대의 것들이다. 전통적인 카르타고 유적은 로마가 파괴했고, 로마시대 유적은 반달족이 파괴했다... 그런데 왜 ‘반달리즘’이란 용어만 생겨났고, ‘로마이즘’이란 말은 없을까? --- p.88 <카르타고에는 카르타고가 없다>
이탈리아 로마에 버금가는 이곳의 유적을 보면서 세계제국 로마에 대해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구문명의 시작이자, 스탠더드 모델이 된 로마는 분명히 세계국가였다. 또 개방된 글로벌 사회였다. 로마의 위대함이 2천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분명 렙티스마그나는 마그레브의 로마였다.” --- p.123 <청출어람, 렙티스마그나>
박물관에서 특히 필자의 눈길을 끈 것은 반 이탈리아 투쟁의 영웅 오마르 알 무크타르의 전시관이었다. 그는 영화 <사막의 라이온>의 주인공으로 전설적인 독립 운동가이다. 이탈리아가 리비아를 점령하자, 1911년부터 20년간 저항운동 지도자로 신출귀몰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결국 1931년 이탈리아 점령군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는데, 그는 리비아 반식민지 해방투쟁의 영웅이 되었다. 그는 “승리가 아니면 죽음이다. 우리에겐 결단코 굴복이란 없다”고 유언했는데, 이 말은 가다피 대통령의 좌우명이 되었다. --- p.151 <독립영웅, 오마르 무크타르>
알제리 편
파농과 까뮈는 지금 알제리에서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들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알제리 사람 십여 명에게 물었지만 아무도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대신 그 자리를 다른 영웅이 메우고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축국영웅 지네딘 지단이다... 알제리에서는 그가 등장하는 광고판이나 사진을 흔히 볼 수 있다... 지단의 아버지는 알제리 독립전쟁 당시 프랑스군에 차출된 아르키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알제리는 독립 후 식민지 잔재 청산작업으로 차출된 프랑스군 50만 명 중에서 15만 명을 처형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단 가족은 고향 알제리로 돌아올 수 없었다. 그가 프랑스 남부의 항구도시 마르세이유 빈민촌에서 태어난 이유다. 지단이 평상시에도 잘 웃지 않고 골을 넣어도 다른 선수들처럼 요란하게 골 세레모니를 하지 않는 이유가 이런 속사정, 즉 불행한 가족사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 p.205 <까뮈도 파농도 없다, 지단은 있다>
북아프리카 마그레브 국가들은 지중해를 닮았다. 지중해는 다양한 종교와 문화와 사람들이 어우러진 복합적인 시공이다. 그래서 수평적이고 수다스럽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알제리다... 그(장 그르니에)의 말대로 알제리를 포함한 지중해는 복합적이고 혼합된 사회다. 누구의 것도 아니고, 또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교류의 결과이며, 여러 세력간 갈등의 흔적이기도 하다. 그것이 모두 엮여서 포용과 융화의 역사로 남은 것이다. 그래서 ‘로마적인 이슬람’, 또는 ‘아랍스러운 가톨릭’이 발견된다. --- p.251 <문명의 이종교배 흔적>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 모른다. 모든 곳이 시작점이고, 끝점이다. 압도하는 건물도 위세부리는 광장도 없다. 다 그만그만하다. 서로 숨소리와 문화를 공유하는 공동영역이며, 평등의 공간이다... 삶의 모습은 중세지만, 정신만큼은 인류가 지향하는 미래임에 틀림없다... 메디나의 철학이다.” (277쪽)
“페스는 냄새의 도시다. 골목의 축축한 향기, 가축들의 퀴퀴한 털 냄새, 스쳐가는 사람들의 묘한 살내, 그리고 태너리의 고약한 냄새가 첩첩이... 또 페스는 화려하고 강렬한 색깔의 도시다. 다양한 색조와 디자인의 카펫, 역사가 진하게 묻어나는 진갈색 목각 장식, 현란한 젤류지의 향연, 눈부시게... 이 모두가 좁은 골목과 낡은 건물 사이에서 난마처럼 얽혀 비로소 페스가 된다. 9,440개의 미로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페스를, 그리고 메디나를 인생 그 자체라고 하는 이유다. --- p.291 <메디나 9,440개의 미로 - 모로코 페스 편>
모로코 편
오커-레드! 직역하면 적황토색쯤 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색깔과 뉘앙스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굳이 설명하자면 빨강과 황토와 분홍의 중간지대쯤인데, 그중 분홍에 약간 더 가깝다... 마라케시 메디나의 로고색은 그렇게 오묘하다. 온 천지가 오커-레드 판이었다... 마라케시의 오커-레드는 자극적이지도 역동적이지도 않다. 강렬한 햇빛을 받지만 번뜩이지도 않는다... 과연 이 오묘한 색깔의 정체는 무엇일까? 원색에서 출발했지만, 파스텔 색조도 들어갔고, 햇빛도 가미됐다. 아프리카이기도 하고, 아랍이기도 하지만, 또 베르베르기도 하다. 그래서 오커-레드는 역사적인 컬러다. --- p.298 <마라케시 로고색 오커-레드(Ochre-red)>
2층도 마찬가지로 사진전이었다. 지중해 인접 27개국 중에서 20개국 이상의 젊은 사진작가들이 참여한 연합 사진전... 전시 주제는 ”Crossing Glances'로 ‘서로 교차해서 보기’, 또는 ‘서로 이해하기’ 라는 의미다... 지중해 문명을 토대로 나눔의 문화를 완성시키고자 하는 그들의 애정과 존중의 마음이 작품들 속에 절절이 녹아있음을 발견할 수 있어 좋았다. 마그레브는 이렇듯 진정한 의미의 지중해 정신을 차근차근 담아가고 있는 것이다. --- p.333 <마그레브는 지중해를 닮았다>
(그는) 떠듬떠듬 영어를 했다. 모로코, 아니 북아프리카에서 영어를 할 수 있는 택시기사를 만나기는 하늘의 별따기라고 들었는데, 마침 별을 딴 것이다... 이름은 모하메디였다... 호기롭게 출발을 했지만 곧 헤매기 시작했다... 마을에 도착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10분, 그러나 박물관을 찾는 데는 20분이 넘게 걸렸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컸다. 택시비로 100디르햄 달라는 걸 50디르햄(5천5백원)으로 깎았기 때문에 미안한 감이 들었지만, 모하메디는 불평 없이 싱글벙글했다.
--- p.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