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억한다. 나는 많은 것들을 기억한다. 사물을 기억하고 사람을 기억하고 장소를 기억한다.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멍하니 있을 때마다 모로코에서의 기억, 파리에서의 기억, 아르헨티나에서의 기억이 불쑥 내 마음 한구석을 때리고 지나간다. 기억의 파편은 희미하게 이미지로 소환될 때도 있고 마치 내가 그곳에 다시 돌아간 것처럼 냄새와 촉감까지 생생하게 재현될 때가 있는데 어느 쪽이든지 간에 나를 뭉클하게 만든다. 나는 이 기억들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살면서 돈을 잃을 수도 있고 친구를 잃을 수도 있지만 굉장한 불운이 닥치지 않는 이상 이를 잃어버릴 일은 없을 것이다.
---‘프롤로그, 그 모든 기억을 껴안고’, 4p
산티아고에 내리면 그 이후로 다시 산티아고에 내리는 일이 없었고 파리에서 내리면 그 이후로 다시 파리에 내리는 일이 없었다. 길 위의 나는 단 한 번 타고 내렸다. 행로는 드물게 왕복이었고 언제나 편도로 흘렀다. 고로 내가 그 도시를 떠나는 버스에 올랐다면 그건 정말로 그 도시를 떠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도착하는 일은 설레었고 떠나는 일은 씁쓸했다. 그렇게 단 한 번의 방문으로 점과 점 사이를 이어가며 선을 그어갔다.
--- ‘기다리는 일, 동작대교를 건너며’, 26p
많은 일이 그렇듯 그 순간은 인상 깊지만 덤덤하게 찾아왔다. 11시 59분이 되자 60초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소리 높여 함께 숫자를 세었고 전광판의 숫자가 1에서 0으로 넘어가는 순간 폭죽과 종이 가루가 머리 위로 흩뿌려졌다. 함께 긴 시간을 버텨준 주변 사람들을 껴안으며 해피 뉴이어를 외쳤다. 키스하는 연인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본 적 없는 사람이고 보지 못할 사람이었지만 그 순간이 선사하는 유대감을 통해 우리는 진심으로 당신의 새해가 행복하기를 빌었다.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한 해였으나 어쨌거나 시간은 흘러 지금의 나는 뉴욕에 있었다. 헛되지 않은 한 해였다.
--- ‘뉴욕, 한 해의 끝에서’, 68p
대학 다닐 돈이 없어서 대학에 가지 않은 건 아니다. 어차피 이 글을 읽고 있는 대학생 대부분도 학자금 대출로 학교를 다니고 있을 거다. 다만 집이 그렇게 여유 있는 편도 아닌데 구미가 당기지도 않는 대학을 대출까지 받아서 가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던 건 사실이다. 다른 글에서도 말할 내용이지만 투자 대비 회수율이 너무 낮아 보였다. 취직해서 또 학자금 대출 갚다보면 서른 중반 넘어서도 부모님이랑 같이 살 내 모습이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모로 내 마음대로 살아보자고 띄워본 패가 ‘수능대신 세계일주’다. 오히려 딱히 잃을 게 많지 않아서 선택이 쉬웠다고 볼 수도 있다. 대학 가서 취직해도 인생에서 크게 득 보는 장사가 아닌 것 같았으니까. 아무튼, 뭐 그렇다. 무엇보다 부모님을 수저에 비유하지 말자. 이 개념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 ‘금수저, 의혹에 대하여', 192p
한 번 뿐인 우리의 인생은 소중하고 값진 것이기에 우리에게는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대부분의 우리는 분투하며 산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전장이 있고 매일 아침 일어나 구태의연하게 반복되어 온 일상을 밀어 올리며 하루를 시작한다. 글의 시작에서 말했듯 나는 나 정도면 굉장히 마음대로 사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나에게도 일상은 자주 전쟁이다. 스스로 허우적거리든, 타인과 맞서든, 마음대로 살기 위해선 불안해하고 고민해야 하며 맞서야 한다. 어차피 밖으로 나가서 돈을 벌어 와야 하고 제 몫을 해내야 하는 게 세상이라면 나는 내 마음대로 사는 편을 택하겠다. 그러니까 다들 마음대로 사시라.
--- ‘마음대로 사세요, 어차피 세상에 나가 싸워야 한다면’, 210p
될 것이라는 믿음과 삶의 방향에 대한 확고한 생각이 있다면 정말로 그렇게 된다. 경험상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에도 전제는 존재한다. 치열한 고민과 노력, 실천을 동반하지 않고서 마냥 나는 해낼 것이라는 믿음만으로 살다가 인생을 시원하게 말아먹은 뒤 이 책이 거짓말을 했다며 침을 뱉고 찢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자기 확신의 힘은 22살의 고졸이 책도 내게 할 만큼 강력한 것이지만 손가락만 빨고 있어도 성과를 척척 가져다줄 만큼 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 ‘될놈될 안될안, 자기 확신의 생’, 223p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은 그 일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아니거나,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거나, 아니면 할 자신이 없다는 의미다.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거나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면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 의미가 없다. 되든 안 되든 못 먹어도 고의 자세로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어떻게 할까’ 라는 질문에는 기본적으로 ‘할 수 있다.’ 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Can’이 아니라 ‘How’에 방점이 찍힌 질문이다. 할 수는 있는데 어떻게 할지 방법을 고민하는 질문이다. 문제의 해결에 집중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어떻게 할까’를 고민해 왔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