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은 먹은 모이를 소화하기 위해, 모래를 먹는다. 인간도 새들처럼, 제 육신 안에 깃든 미움이나, 분노, 원망 같은 것들에 갇히지 말고 모래를 삼키는 새처럼 삼켜야 자유로워진다. 누구나 제 몫의 모래를 삼켜야 하는 것이, 인생의 도리라……!
--- 본문 중에서
‘날고 싶다’가 인류의 오랜 공통된 꿈이라는 데는 별로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날개가 없어 자체 동력으로 3차원의 이동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오래 전 ‘이카루스의 날개’가 이미 알려주었던 선험적 경험이며, 30년대 이 땅의 천재였던 ‘이상(李霜) 역시 《날개》를 통해 간파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주어진 조건에서의 일탈, 혹은 비상의 염원은 인간의 생래적 욕망이다. 그러나 그 일탈의 결말에 좌절이 전제되었다면 ‘날다’라는 동사는 비극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비극의 극복은 어차피 ‘꿈꾸기’와 무관하지 않을 터, 결국 꿈꾸기인 것이다.
유금호(소설가, 목포대 명예교수)
--- 작품 해설 중에서
“차를 끌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데 작은 절이 하나 보이더라구. 올라갔지. 절 마당에 앉아 숲을 바라보는데 새들이 마당으로 내려와 부리로 뭔가를 쪼는 거야. 모이를 찾아 먹는 줄 알았는데 가만히 지켜보니 모래를 먹고 있더라구. 그때 스님이 지나가다 그걸 지켜보고 있는 나를 보고 다가오더니 그런 말을 하더군. 새들은 제 먹은 모이를 소화하기 위해 모래를 먹는 거라고. 그리고 다시 우리 인간도 저 새들처럼 모래를 삼켜야 한다고. 우리 육신 안에 깃든 미움이나, 분노, 원망 같은 것들에 갇히지 말고 모래를 삼키는 새처럼 삼켜야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누구나 제 몫의 모래를 삼켜야 하는 것이 인생의 도리라고……. 그 말을 듣고 나서 다시 가만히 새를 보고 있는데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수신제가가 엉망이 되어 버린 내 초라해진 모습도 보이고 문득 새처럼 모래를 삼키고 있는 당신 모습이 보이는 거야. 모래주머니도 없이 그걸 삼키고 삭이느라 힘들어 하는 당신이…….”
남편의 말에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다.
“미움이나 분노, 원망 같은 것들에 갇히지 말고 모래를 삼키는 새처럼 삼켜야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당신 말, 오늘은 당신이 진짜 시인 같네요.”
--- pp.36~37
“마음에 나만 담아 놓고 세상을 살면 말이여. 나만 옳고 다른 사람은 다 나쁘게 보이는 겨. 그래서 내게 닥치는 일들이 모두 분하고 억울한 것뿐이고 좌절하고 절망할 일밖에 없는 거란다. 허지만 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세상을 보면 말이여, 서로 불쌍하게 보이는 것이여. 어지간하믄 조금 더 낫다고 생각하는 쪽에서 말귀 못 알아먹는 모자란 인간 도와주는 셈 치고 불쌍하게 보아주고 말거라.”
시어머니는 남달리 배운 학식이 있거나 인품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살아온 세월 또한 녹록치 않아 그 마음이 꼬이고 비틀리려 들면 한없이 꼬이고 비틀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그러울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신앙심이 마음의 바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 p.53
지금은 어디로 가버렸나. 나 젊을 때는 마을에 황새가 터를 잡고 살았다. 그 황새가 참 영물인 것이 한번 짝을 맺으면 평생을 같이 허고 부모새가 늙어 힘이 빠지거나 병이 들면 새끼들이 먹이를 물어 날라 봉양을 하며 보살피고 형제새끼리도 사이좋게 지내더란 말이여. 사람들은 그 새를 울지 않는 새라 허더라. 그건 황새가 다른 새와 달리 목울대가 없기 때문이라 허대. 그런디 말이여. 내 생각에는 그 황새 눈알이 눈병난 것처럼 시뻘건 건 소리 내어 울지 못하지만 니도 나처럼 남 몰래 속울음을 많이 우는구나 싶더라.
--- pp.53~54
사람 사는 근본이 어때야 하는가 누가 내게 물어보면 말이다. 나는 더도 덜도 말고 꼭 저 황새처럼 살면 된다고 말하겠데이.
--- p.55
천 년, 만 년, 아니 어쩌면 억겁의 세월을 지나 만난 오늘 또한 잠시 스쳐가는 슬픈 인연이 되어 헤어질지라도, 그 꽃잎 그리움의 눈물 되고 그 깃털 긴 기다림이 되었다가 육신을 벗고 혼백이 되어 우리 다시 어느 새들의 몸을 빌려 환생을 하면, 그때는 이별 없는 창공에서 둘이만 아는 지줘귐으로 환희의 내 사랑, 마음껏 애무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 p.81
그런 내 모습이 싫어 나는 그 숲의 기억으로부터 도망치기로 결심했습니다. 내가 그 숲을 그리워하며 마음앓이를 하고 있던 그 시간, 어쩌면 그날의 흔적이란 말끔히 지워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이제 그 숲의 환상에서 빨리 빠져나와야 한다고……. 마사이 남자가 떠나는 백인 아내의 등뒤에서 다시 그곳으로 되돌아오지 않을 걸 이미 알고 있었다고 독백을 흘리고 있었듯이, 나도 다시 그 숲으로 되돌아가지 못할 것이란 걸 이미 알고 있지 않았었냐고……. 그렇게 그 숲으로 향하는 마음을 부정하며 다시는 그곳으로 날아갈 수 없는 내가 되기 위해 내 몸에 난 깃털을 뽑는 일을 했습니다.
누구에겐가 홀려 있을 때는 뜻없이 빙그레 웃는 미소 한 줄기에도 찬란한 빛으로 보이는 그 환(幻)도 깨고 나면 남루한 옷가지처럼 추해 보이듯, 그 숲의 의미 또한 내게 그렇게 소멸해 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일까요. 깃털을 뽑아 버린 그 자리에는 어느새 새 깃털이 자라 있고 여전히 그 숲속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나를 발견할 뿐입니다.
--- pp.98~99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 있는 새끼 새 주변을 종종걸음을 치며 맴돌고 있었던 어미 새는 마침내 체념을 했는지 날개를 펴고 후드득 제 영역 쪽으로 날아가고 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둥지에 남아 있던 다른 새끼 새들에게 부리로 먹이를 잘게 찢어 입안에 넣어준다.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어미 새는 새끼 새의 죽음을 잊은 것일까? 아니면 죽은 척하는 것일까?
그걸 보면서 나는 새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날기 위해 뱃속을 비우는 일에 전력을 다하는 나머지 뼛속까지 비운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아내가 죽은 후로 잊고 비워야함 할 고통스런 기억이 있는 인간에게는 기억이야말로 신이 내린 가장 혹독한 형벌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새들이 타 동물에 비해 기억력이 짧은 것은 진화의 부족이 아니라 창조주로부터 가장 빨리 망각할 수 있는 축복을 받은 것이라 여겨졌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내 안에서 고통이 되는 기억들은 저 새처럼 빠르게 비워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남은 시간을 살아내고 싶다.
--- p.120
……몸에서 젖은 새의 깃털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마침내 참을 수 없는 격정 속으로 빠져들며 내 입에서는 괭이갈매기처럼 아르르륵 아르르륵 하는 울음소리가 난다. 땀과 빗물이 뒤범벅된 상태에서 …… 물안개가 자욱한 바다 어디쯤에서 아루룩~ 아루룩~ 괭이갈매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짙은 해무로 인해 시정거리가 2~3미터도 채 되지 않는 상황이었으므로 괭이갈매기들도 우리 일행처럼 섬 주변의 어느 바위 위에 자기들끼리 몰려 앉아 파랑주의보가 해제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일 것 같다.
--- p.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