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혜숙 ruru100@yes24.com
메인 스토리가 분명하고 주제가 확실히 전달되는 고전적 구성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처음에는 낯설고, 어색한 영역이었다. 처음부터 구조를 엄밀하게 짜지 않고, 자연스럽게 분출되는 느낌을 특유의 감성으로 표현해 내는 하루키는 자유로운 구성으로 독자를 혼란시키기도 하지만 분명한 문장 구사력, 재기발랄하고 감각적인 문체로 매혹한다.
보는 이에 따라 그의 대표작은 『노르웨이의 숲』도 있고, 『댄스 댄스 댄스』도 있고,『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도 있고, 빛나는 여행 산문들도 있겠지만, 하루키 자신이 가장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여 완성했다는 작품은 『태엽 감는 새』이다. 이 작품은 특히 평단의 반응이 좋았는데, 다소 가볍게 보이는 여타의 작품들을 뛰어 넘으며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보여 준 하루키 문학의 정점을 이루었다는 평이다. 특별한 이유없이 직장을 그만두고, 단지 허기를 면하려고 한밤중에 빵 가게를 습격하는 주인공들, 평범한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개입되는 비현실적 소재 등 하루키 작품에서 만날 수 있는 전형적인 이미지는『태엽감는 새』 속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지만 좀더 공들여 다듬은 비유와 상징, 끊길 듯 이어지는 상호 맥락, 불규칙한 듯 전체적으로 일치하는 구성까지 한층 치밀하게 준비하고, 계산한 흔적을 보여 준다.
외형적으로 보면 『태엽 감는 새』의 스토리 구조는 단순하다. 나이 서른에 실직한 한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나가 버린 아내를 찾아 헤매는 과정을 그리고 있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상징물들의 함축적 의미와 맥락, 그속에 담긴 자기 성찰적 독백, 소설적 의미는 그리 단순하지 않아 보인다. 이 책에 대한 무수한 해석을 따로 모아 책으로 엮을 수 있을 만큼 복잡한 의미와 구도인 것이다.
『태엽감는 새』의 주인공 도루 오카다는 어느 날, 로시니의 음악을 들으며 스파게티를 만들다가 낯선 여자의 전화를 받는다. 곧이어 고양이의 실종과 아내의 가출, 영매 자매의 등장 같은 일련의 기묘하고, 초자연적인 사건을 맞이하게 되는데 여기서도 요리와 다림질, 먹기와 옷 입기 같은 평범한 일상에 대한 하루키식 성찰은 계속되어 감칠맛을 자아낸다.
『태엽감는 새』는 주인공도루 오카다와 사라진 아내 구미코, 영매 자매 가노 마루타와 구레타, 이웃집 소녀 가사하라 메이, 아내의 오빠이자 대적하게 될 인물 와타야 노보루, 점쟁이 혼다 노인과 마미야 중위 등 다양한 인물이 촘촘하게 얽힌 복잡한 관계를 형성해 간다. 또한 소설 속에 등장하는 독립적 이야기, 마미야 중위의 만주 주둔 이야기가 액자 소설로 구성되어 색다른 재미를 안겨 준다. 소설을 푸는 실마리도 수수께끼 하나가 또 다른 수수께끼와 맞물린 방식으로 연결되며 마지막까지 손을 뗄 수 없는 강한 흡인력을 이끌어 낸다.
작품에서 일관되게 보이는, 하루키가 다루어 온 작은 것에 대한 연민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태엽이 감겨 움직이는 하찮은 존재, 마치 주인공의 분신처럼 상징되는 `태엽감는 새'로 대표된다. `세상이 아무리 훌륭하고 빈틈이 없어도 태엽감는 새가 태엽을 감지 않으면 세계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같은 메시지를 통해 그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의 끈을 여전히 놓지 않는다.
하루키의 소설에서 특히 관심이 가는 부분은 타인과 교류하는 관계의 방식이다. 하루키의 주인공들은 출세나 성공과는 거리가 먼 평범하고 나약한 인물, 언뜻 보기엔 다소 무심하고 부족해 보이는 인물들로 고독 속에서 상처 받고 살아가지만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할 줄 아는 인물들이다. 영매 자매인 가노 구레타와 마루타는 어떤 물질적 대가 없이 - 어쩌면 스스로 구원 받으려고 해서일지 모르지만 - 주인공을 도와 주며, 그 밖의 인물들도 그가 도움을 필요하게 되면 어김없이 등장한다. 주인공도 이웃의 가사하라 메이, 구레타 등 주위의 상처 받은 인물들을 도와 주는데 이들은 서로 도움을 주는 관계 속에서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고, 존재의 나약함을 극복해 나간다. `개인적 성향'을 지닌 하루키의 인물들이 서로를 구원하는 방식은 타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기, 필요할 때 자신의 힘을 발휘하는 것 등 같은 자연스러운 배려로 호기심으로 타인에게 보이는 말초적 관심과는 구별된다. 악인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여타의 하루키 소설과는 달리 『태엽감는 새』에선 와타야 노보루 라는 악인이 전면에 등장하여 문제를 일으키지만 인물들의 관계가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얽혀 서로 필요한 존재가 되어 준다. 무던하지만 따뜻한 시선, 적극적이진 않지만 필요한 부분을 메워 주는 섬세한 배려는 하루키가 작은 것에 보이는 애정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아무 목적 없이 타인을 돕거나 부담스럽지 않게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현실 속에서는 힘들어도 보이지만, 하루키의 소설 속에서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인간에 대한 포용력으로 결코 사람을 몰아 세우거나 추궁하지 않을 분위기를 느끼는 것, 타인에 대한 배려는 자신의 기준에서 평가하거나 충고하지 않고, 상대가 절실함을 느낄 때 손을 내미는 방식임을 보여 주는 것, 일방적으로 다가가는 대신 한 발 떨어져서 상대를 편안하게 하는 성숙한 의식을 배우는 것. 그래서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일은 안락하고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