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옛 적국’ 일본에서 베스트셀러로 … 류성룡은 ‘명재상’으로 인식돼
『징비록』은 임진왜란이 끝난 지 약 백년 후인 17세기 후반, 조선통신사를 수행한 역관들에 의해 일본에 밀반출되어 교토(京都)에서 원문(한문)에 일본식 훈점(訓點)을 붙여 『조선징비록(朝鮮懲毖錄)』이란 이름의 번역본으로 간행(1695년)되었다. 이후 『징비록』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약 3백년간 일본과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번역, 영인본 등으로 최소 30여종 이상 발간되는,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에도시대에 『징비록』은 임진왜란을 다룬 전기, 소설류인 『조선군기물(朝鮮軍記物)』 등에도 그 내용이 빈번히 인용됨으로서 일본의 식자층뿐만 아니라 서민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이에 따라 에도시대 중기에는 유학자들의 한시(漢詩)를 비롯하여 대중소설 등에 『징비록』의 이름을 붙이거나 그 내용이 다루어지고, 전통공연에 류성룡이 등장하는 등 일본사회에 ‘징비록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조선징비록』은 19세기말 일본에 체류중이던 중국인 학자에 의해 청나라에 전해지고, 메이지(明治,1868-1912년) 초기에는 주일 영국외교관이 『조선징비록』의 내용을 사상 처음 영어로 번역하여 임진왜란 관련 영문저술에 인용하는 등 『징비록』은 임란을 다룬 문헌으로서는 현재까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가장 높이 평가되고, 가장 널리 알려진 명저, 고전이 되었다.
참고로 근·현대 일본인 학자 등의 『징비록』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자. 에도시대의 유학자로부터 일제강점기를 전후한 근·현대의 일본 역사가들에 이르기까지 ‘임진왜란에 관해 이보다 더 나은 사서(史書)는 없다’고 입을 모으며, 특히 『징비록』이 류성룡의 체험에 바탕한 풍부한 사료를 구사하여, 기술한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임진왜란에 관해 이보다 더 나은 사서는 드물 것” … 일본 역사가들 『징비록』 절찬
이처럼 『징비록』이 에도시대 일본에 전해진 이래 수백 년간 꾸준히 읽히면서, 임진왜란에 관한 가장 뛰어난 ‘명저’라는 평가와 함께 저자인 류성룡과 『징비록』에 상당한 분량으로 서술된 이순신의 활약상 등도 일본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근·현대에 들어와 일본인들로부터 류성룡은 ‘조선의 명재상’, ‘현상(賢相)’, ‘역사가’ 등으로, 이순신은 ‘조선 구국의 영웅’, ‘세계 제일의 해장(海將)’ 등으로 평가받으면서, 특히 이순신은 1980년대 이후에는 일본 각급 학교 교과서, 참고서에도 일제히 소개되는, 아마도 류성룡과 이순신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을 현상마저 나타났다.
그러나 정작 조선(한국)에서는 『징비록』은 첫 간행(1647-8년)부터 해방(1945년)까지 약 3백 년간 단지 수종(4종 추정)이 발간되는 데 그쳤다. 조선(한국)보다 일본에서 『징비록』이 최저 수배, 최대 열배 가까이 더 간행된 것이다.
『징비록』을 읽고, 앞날에 대비해야 할 조선(한국)보다 뜻밖에도(?) ‘옛 적국’인 일본에서 더 많이 간행되고, 더 많이 읽힌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이 기막힌 아이러니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징비록』이 조선(한국)보다 일본에서 최저 수배, 최대 열배 가까이 더 많이 간행됐다는 사실은 바로 한일양국의 지력(知力), 나아가 국력의 차이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류성룡이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여, 앞날의 환난에 조심해야 한다’고 절규했건만, 대비하지 못한 조선은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1910년)하여 35년간 질곡에서 신음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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