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 채동은 뭔가 찜찜한 것이 있었으나, 계암의 부탁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의초 스님이 살아계실 때부터 오랜 동안 계암이 마을 사람들에게 베푼 은혜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명학에 대한 의구심을 버리지 않고, 남모르게 그를 지켜보았다. 그간 지켜본 바로는 특별히 수상한 것은 없었다. 명학은 계암과 함께 약초밭이나 곡식밭을 가꾸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마을 뒤쪽 억새밭을 개간하는 일도 했다. 그리고 계암을 도와, 틈나는 대로 여민암을 찾아오는 환자들을 보거나, 자리에 누워서 굴신을 못하는 환자를 찾아다니곤 했다. 밤늦은 시간엔 계암과 명학이 이야기를 나누는 그림자를 창호지 너머로 자주 보았지만, 특별히 이상할 것은 없었다.
꼭이 이상할 것이 있다면 계암과 명학이 어떨 때는 10여 일, 어떨 때는 20여 일을 마을을 떠나 어딘가를 다녀오는 것이었다. 채동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서, “이 며칠 어디 다녀오셨시꺄?” 하고 물으면, “나는 중이라 만행(卍行)을 하고, 명학 장사는 고향엘 다녀왔소이다.” 하고, 계암이 심상하게 대답했다. 망이는 예전 계암 스님이 의초 스님을 따라 했듯, 계암의 그림자처럼 함께 움직였다. 다른 것이 있다면, 계암은 스님으로서 홀몸인데 비해, 명학에겐 고운 부인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부인이 둘째 아이를 낳은 지 이제 100일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네놈 엄장이 힘꼴깨나 써 보이나, 싸움은 힘으로만 하는 게 아니다. 이 어르신이 오늘 네놈에게 따끔한 교훈을 주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짱똘이가 몸을 날려 웅태를 쳤다. 저잣거리에서 어렸을 때부터 싸움으로 잔뼈가 굵은 짱똘이는 싸움은 힘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무엇이든 고수(高手)가 되려면 상당 기간 꾸준한 연습과 수많은 실습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만, 특히 싸움은 실전(實戰)이 최고의 훈련이었다. 싸움 솜씨야말로 무수히 많은 실전을 통해서만 터득되는 전문적인 기술이랄까. 모든 신경을 집중하여 상대방과 겨룰 때 자기도 모르게 터득되는 몸놀림은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상황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몸이 움직이는 경지에 도달해야 하며, 번개 같은 선제공격과, 단번에 상대방의 급소를 정확하게 치는 자기만의 독수(毒手)를 가져야만 진정한 싸움꾼이라 할 수 있었다. 짱똘이는 저잣거리의 대형님이 된 뒤부터 자기야말로 그런 싸움의 비결을 체득한 고수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웅태는 암암리에 짱똘이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다가, 재빨리 그의 공격을 피하며 반격을 가했다. 두 사람은 한식경이 넘도록 용호상박(龍虎相搏)으로 치열하게 치고받았다.
-망이와 이광의 명령이 떨어지자 명학군은 건물 문을 박차고 들어가, 닥치는 대로 몽둥이질을 하며 사람들을 붙잡아 밧줄로 묶었다. 사또 이안용과 그의 처자들, 노비들이 잡히고, 아전에서 잠을 자던 군졸과 관노, 사령 들도 모조리 잡혀서 동헌 마당으로 끌려왔다. 삼문과 옥사에서 수직을 서던 군졸이나 관노 중 몇 명이 도망치기도 했으나, 그 대부분이 체포되었고, 반항을 하다가 칼이나 창, 몽둥이에 부상을 당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유성현을 완전히 점령한 명학군은 옥사로 몰려가, 옥문을 열어젖혔다. 망소이와 탄동 아씨, 계룡산 녹림당과 웅태, 그 밖에 조세나 공물(供物)을 바치지 못해 잡혀왔던 고을 사람들이 우루루 쏟아져 나왔다. 만세! 만만세! 명학군 만세! 명학군 만세! 망이 장군 만세! 명학군이 외치는 함성이 유성 현청을 우레처럼 울렸다.
-명종 6년(1176년) 2월 정해일(丁亥日) 정황재가 남적집착병마사(南賊執捉兵馬使), 장박인이 부병마사(副兵馬使)가 되어, 토벌군 3천 명을 거느리고 공주를 향해 진격했다. 토벌군은 첫날을 수원부에서 묵고, 이튿날은 안성현에서 쉬었다. 그리고 사흘째 날 직산현을 지나 차현(車峴)고개 아래 광정 마을에 도착했다. 차현 고개는 백두대간에서 줄기를 친 차령산맥이 서해 바다를 향해 내달리는 중간에 있는 재(嶺)로서, 호남으로 진격하려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요해처였다. 차현을 넘는 길은 깊은 골짜기를 지나 가파르고 좁은 길이 구불구불 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차령산맥은 예로부터 남도와 중부를 가르는 큰 산줄기로서, 대군이 한꺼번에 나아가기가 어려운 곳이었다. 만약 이런 곳에 복병이 숨어 있다면 일당백(一當百)이 될 텐데, 병법을 모르는 무식한 놈들이 무얼 알겠나! 정황재가 고개를 올라가며 그런 생각을 하고 혼자 웃는데, 사방에서 징과 꽹과리 소리가 우레처럼 일어나며, 화살이 굵은 빗발처럼 쏟아졌다. “모두 물러나라! 물러나라!”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