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불을 켜놓으면 기름이 닳는다.“얼른 불 끄고 자거라!” 안방에서 석유가 닳는 것을 아까워하는 어머니의 걱정이 들리기도 했다. 지금이야 옛날의 등잔불과는 비교도 안 되는 전깃불을 켜고 있지만 전기 돌아간다고 불 끄기를 채근하는 말은 그때만큼 듣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엔 석유도 귀해 오일장 장 장날이면 십 리 길을 걸어 대두 한 병씩 사다 놓고 어둠을 밝히는 데만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아끼라는 얘기가 저절로 나왔다. 석유를 먼 장에까지 가서 사들고 오기가 번거로워서 새벽에 석유통을 등에 메고 다니며 파는 석유 장사에게 사서 쓸 때도 있었다.
등잔은 나의 아련한 추억이다. 내 어릴 적엔 낮에 미처 못 한 학교 숙제도 호롱불 밑에서 해야 했고 공부한다고 밤늦게까지 앉은뱅이책상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다가 앞머리를 호롱불에 태워먹는 일도 있었다. 재미있는 옛 추억이 새롭다.
--- p.26, 「가난했던 시절, ‘등잔’」 중에서
층층시하에 갓 시집와서 고개도 못 들고 시집살이하고 있을 때였다. 5일장에 다녀온 시어머님께서 갈치를 넉넉히 사 왔으니 저녁 밥상에 식구 수대로 갈치 한 토막씩 구워 상에 올리라고 말씀하셨다.
대가족이라 무쇠가마솥에 저녁밥을 지었다. 솔잎 낙엽과 갈비로 태운 빨간 불에 구운 석쇠 갈치구이는 수분이 줄고 특유의 향기와 고소함이 더해져서 식감이 일품이었다. 나는 정성껏 식구 수대로 갈치를 구워 부뚜막에 놓았다. 온 집안에 갈치 냄새가 그득했다. 그런데 아뿔싸, 내가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강아지가 생선 한 토막을 물고 달아났다. 이 일을 어쩌나 하고 당황하는 사이에 외출했던 신랑이 왔다. 뭐 때문에 수심이 가득한 얼굴이냐고 묻기에
“저녁 밥상에 갈치구이 한 토막씩 놓기로 했는데 강아지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신랑이 얼른 밥상을 차려 빈 접시를 하나 놓으라 했다. 신랑이 허겁지겁 밥을 먹고 상을 물리는데 들에 나갔던 식구들이 돌아왔다. 어머님이 큰애 갈치 한 토막 줬냐고 하시니 신랑이 얼른 오늘 갈치는 참 맛있었다고 둘러대었다. 신랑 덕분에 꾸지람은 모면했지만 참으로 민망한 노릇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꼬막 단지에서 갈치 한 토막 더 꺼내어 구웠으면 될 것을. 그때는 거기까지는 생각이 못 미쳤다.
--- p.60, 「나무 같은 삶, ‘갈치 한 토막’」 중에서
황망 중에 며느리를 앞세워 재래시장을 찾았다. 내 손으로 남편에게 수의를 만들어 입히고 싶었다. 자식들이 나의 건강을 염려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수의 재료상에서 삼베를 넉넉히 구입했다. 그러나 그렇게 손수 재단하고 만드는 중에 남편은 운명했다. 야속한 사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지. 나는 밤새 눈 한번 안 붙이고 재봉틀을 돌렸다. 한 땀 한 땀 사랑과 정성으로 남편의 수의를 장만했다. 박음질에 손이 바늘자국투성이가 되었지만 마음은 편안했다. 일생을 같이한 사람이 아니던가.
사람이 한평생 살며 여러 종류의 옷들을 입지만 죽어서 세상을 하직할 때는 염색하지 않은 소색消色 수의를 입는다. 지방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이승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지막으로 입고 가는 옷이 바로 하늘 옷, 수의이기 때문이다.
--- p.66, 「나무 같은 삶, ‘수의’」 중에서
대망의 시험일이 다가와 시험 장소로 출발을 했다. 들뜨기도 했고 걱정도 많이 되었다. 혹시나 공부한 내용이 시험에 나오지 않으면 어쩌나? 과목별 합격으로 이번이 마지막 세 번째라는 걱정도 들어 잠시 마음을 모아 합격의 기도도 했다. 그런데 막상 시험지를 받으니 그런대로 공부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실수나 오타로 잘못될까 봐 꼼꼼히 확인했다.
합격증 발표 하루 전날 전화벨이 울려 받으니 교육청이었다. ‘최고령자 합격입니다.’하는 소식에 대책 없이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고등 교육 분야는 76세의 내가 대구, 경북에서 최고령 합격자라 했다.
2015년 5월 12일 대구교육청 검정고시 합격증 수여식 날 교육감님은 최고령에 공부하시느라 수고 많이 하셨다고 격려하시며 대학에도 꼭 진학하라고 하셨다.
“네. 감사합니다.”
방송국에서도 76세 할머니의 고졸 합격 축하 인터뷰를 했다. 3일 동안 뉴스 시간에 방영되었다. 여러 곳에서 축하의 메시지가 끝없이 이어졌다. 합격이란 두 글자가 나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 같았다. 학원 앞에도, 골목길에도 현수막이 걸렸다. 내 삶에 한이 되었던 고졸 합격증이었다. 남편도, 자녀들도, 손자, 손녀까지도 공부하느라 고생 많으셨다고 할머니에게 파이팅~을 외쳤다.
그러나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대학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 p.102~103, 「도전하는 삶, ‘검정고시 도전’」 중에서
글쓰기는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못난 과거와 정직하게 직면하는 것도 어렵지만 내 안의 나를 끄집어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아둔했고 선생은 깐깐했다. 누가 수필을‘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 했던가. 나의 붓은 황소처럼 느리고 무뎠다. 도무지 앞으로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참으며 기다렸다. 나의 황소가 움직여 주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러던 어느 깊은 밤, 나는 잠 못 들고 황소를 달래며 어르고 있다가 긴 한숨을 뱉으며 그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첫 작품이 태어났다. 「수의」였다.
「수의」이후 나의 과거는 다투어 줄을 섰다. 어린 시절, 청년기, 노년기가 튀어 나왔다. 슬픈 일과 기쁜 일, 억울한 일들이 다투어 정렬했다. 나는 썼다. 쓰고 또 썼다. 선생은 말없이 기다려 주었다. 일자무식꾼에 나이까지 많은 제자의 배추장사 문서 같은 글을 묵묵히 읽어주었다.
--- p.132~133, 「도전하는 삶, ‘도전하는 삶’」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