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놀드의 플레이가 역사상 어떤 골퍼보다도 공격적인 스타일이었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한다. 그러나 그의 스타일이 프로골퍼로서 올바른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있다. 아놀드는 그의 무모한 스타일 때문에 최소한 20개 대회의 우승을 놓쳤다고 말한 프로가 있기도 하고, 아놀드의 플레이 능력에 냉철한 판단력으로 유명한 벤 호건의 머리를 조합했다면 아놀드의 메이저 우승 횟수가 훨씬 늘어났을 것이며, 그의 전성기도 길어졌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정작 아놀드는 그런 의견들에 동의하지 않았다. 너무 공격적이라 우승을 놓친 대회도 있지만 반대로 공격적이었기 때문에 역전 우승한 대회도 많았고, 대회의 성적으로만 평가받는 골퍼보다 플레이 과정으로 팬들을 즐겁게 해주고 사랑을 받는 골퍼가 더 자랑스러운 골퍼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 p.58
1965년 오랫동안 기다려온 게리의 그랜드 슬램이 드디어 완성되었다. 미주리 주 세인트 루이스 근교 벨러리브 컨트리클럽Bellerive Country Club에서 열린 1965년 US오픈에서 우승을 한 것이다. 1, 2라운드에서 70-70으로 이븐파를 친 게리는 호주의 켈 내글에게 1타 차로 선두를 지켰고, 3라운드에서 게리 71타, 내글 72타로 이제 2타 차 선두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라운드가 열린 일요일(US오픈은 1965년부터 토요일에 3, 4라운드를 플레이하던 관행을 바꿔서 최종 라운드를 일요일에 열도록 조정하였다)에 게리는 16번 홀까지 3타 차 선두를 지키며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이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파5, 17번 홀에서 게리가 더블보기를 범하는 사이 내글이 버디를 기록함으로써 순식간에 두 선수는 공동 선두가 되었다. 18번 홀을 파로 끝낸 두 선수는 월요일에 18홀 연장전을 벌였고, 게리가 71타를 쳐서 내글의 74타를 꺾고 챔피언이 되었다. 게리는 우승 상금 25,000달러 전액을 미국 암연구센터와 주니어골프 육성 재단에 기부하였다. 그는 29세에 진 사라센Gene Sarazen(32세에 달성), 벤 호건(40세에 달성)의 뒤를 이어 역사상 세 번째로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1966년 잭 니클라우스가 26세에 네 번째로 달성했고, 2000년에 타이거 우즈가 24세의 나이로 다섯 번째 그랜드 슬램의 주인공이 되었다. --- p.79
1986년 4월, 마스터스 대회를 앞두고 신문들은 연일 46세가 된 잭 니클라우스에 대한 기사를 쏟아내고 있었다. ‘이제 골프 선수로서는 수명이 끝났다’, ‘골든베어는 동면에 들어갔다’, ‘그의 골프클럽은 이미 녹이 슬었다’, ‘이제 골프대회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골프장 디자인 사업에나 전념하라.’ 1980년 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이후 5년 동안 메이저 대회의 우승이 없었고, 이제 46세가 된 잭에게 우승의 희망을 거는 전문가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잭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젊은 시절 가졌던 우승에 대한 열정이 살아있었다. “뭐라고? 내가 끝났다고?” 잭은 그 기사를 쓴 기자들을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대회가 시작되었고 74-71-69타를 기록한 잭은 선두 그렉 노먼에 4타 차이로 9위에 머무르고 있었다. 마지막 라운드가 열리는 일요일 아침, 잭은 아들 스티브에게 65타를 치면 우승할 수 있고, 66타면 연장전에 가게 될 것이라 예언하며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으로 갔다. 8번 홀까지 겨우 이븐파의 점수였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플레이하던 잭에게 9번 홀에서 버디 기회가 왔고 3미터짜리 버디 퍼트를 성공시키며 선두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결국 9번 홀부터 18번 홀까지 10개의 홀에서 7언더파를 몰아친 잭은 65타를 기록하며 역전 우승을 차지했다. 46세의 최고령 마스터스 챔피언이 되었으며 6번째 마스터스 우승이고 18번째 메이저 우승이었다. --- p.98~99
리는 디오픈을 아주 좋아했다. 1969년에 처음 참가하여 바닷가 링크스 코스를 처음 쳤던 날, 안개와 바람과 바다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장타를 치지 못해도 똑바로 치면 유리하고 또 높은 공을 못 쳐도 불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리처럼 낮은 공을 쳐야 바람의 영향을 피할 수 있다. 딱딱한 그린 주위에서는 범프 앤 런Bump and run 샷이 필요한데 리는 그 샷을 누구보다도 잘했다. 또 영국 갤러리들의 수준은 미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다. 샷의 결과가 아닌 창의성을 알아보고 갈채를 보내고, 명예와 전통과 역사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수만 명이 모인 마지막 홀 그린에서도 정적이 흐를 정도로 조용하다. 사인을 요청하는 아이들도 미국처럼 휴지나 껌 종이를 내미는 일이 없다. 할아버지부터 물려온 사인 노트를 가지고 조용히 기다린다. 레인코트와 긴 부츠를 챙겨서 신고 온 갤러리들은 모두 형제처럼 질서 있게 움직여 주었다. 디오픈은 리가 가장 오랫동안 참가하고 싶은 대회가 되었다. 1970년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코스에서 3라운드까지 선두였다가 4라운드에 77타를 치면서 우승을 놓친 경험이 있지만 결국은 우승컵 클라렛 저그에 자기 이름을 새길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 p.188~189
1987년 디오픈은 뮤어필드에서 개최되었다. 뮤어필드의 공식명칭은 ‘The Honorable Company of Edinburgh Golfers’인데 1744년에 창립된 최고의 프라이빗 골프클럽으로 아직도 여성회원을 허락하지 않는 보수적인 클럽이다. 뮤어필드 골프코스는 올드 톰 모리스Old Tom Morris가 디자인하여 1891년에 오픈하였고, 그 이후 몇 번의 코스 디자인 수정이 있었다. 대부분의 링크스 코스들은 전반 9홀을 같은 방향으로 나갔다가 후반 9홀에 돌아오는 디자인이므로 바람의 방향이 같다면 각 9홀들을 같은 바람 속에서 플레이하게 된다.
그러나 뮤어필드는 전반 9홀을 시계 방향으로 돌고 후반 9홀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도는 구조이므로 홀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게 된다. 디오픈을 16번 개최했고 월터 하겐, 헨리 코튼, 게리 플레이어, 잭 니클라우스, 리 트레비노, 톰 왓슨 등 최고의 골프영웅들이 우승자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뮤어필드에 도착한 닉은 텅 비어있는 노란색 리더보드를 바라보며 마지막 날 맨 꼭대기에 자기의 이름이 남게 되는 상상을 하였다. 리드베터가 닉에게 다가와 말했다. “닉, 너는 지금 생애 최고의 스윙을 하고 있어. 우승을 두려워하지 마.” 닉은 스스로 이제 메이저 챔피언으로 등극할 준비가 끝났음을 선언했다.
--- p.255~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