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참 행복을 향해 주를 향한 처음마음을 새롭게 하라
거짓된 행복
최근에 내 눈길을 잡아끄는 사진이 하나 있었다.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 부부가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설명을 보니, 그 사진은 위원장 부부가 묘향산 기슭에 있는 소년단 야영소를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그 사진 속의 아이들의 모습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 사진 속에는 남루한 옷차림을 한 어린아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감격에 겨워 박수를 치는 그 모습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나는 만감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그 사진을 한참 동안이나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의 아이들이 느끼고 있는 지금의 저 행복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러 가지 생각이 겹쳤지만, 무엇보다 나는 김정은 위원장 앞에서 행복해서 눈물 흘리는 그 아이들이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마음이 아팠다. 지금 그 아이들이 느끼는 행복감은 눈이 가려진 행복감,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호도된 거짓된 행복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을 모르는 사람들
그러다가 문득 몇 년 전에 텔레비전에서 방영한 〈행복의 비밀코드〉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가 생각났다. 그 프로그램에서 ‘서울 시민의 행복도 조사’라는 설문조사 결과를 보여주었는데,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돈’이라고 응답한 사람의 비율이 40.6퍼센트로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돈이 얼마나 있다면 행복할까?”라는 질문에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10억에서 50억 사이’라고 응답했는데, 그 수치가 무려 39.25퍼센트에 달했다.
그런데 막상 전문가들이 ‘행복과 소득과의 상관관계’를 조사해보니, 월수입 400만 원까지는 행복도가 수입의 증가와 비례해서 상승하지만, 400만 원 이상부터는 수입이 증가해도 더 이상 행복도가 상승하지 않았다.
또한 실제로 월평균 소득이 월 430만 원인 사람과 680만 원인 사람과의 ‘소득과 행복 점수’ 차이를 조사한 결과, 두 사람 사이의 행복도에는 차이가 거의 없었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나는 것일까? 사람들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사랑하는 가족이나 소중한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 등 정작 중요한 것들을 잃거나 포기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더 많은 돈을 벌면 그에 비례해 행복도 증가되는 줄 알고 숨가쁘게 달려가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진짜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
나는 이처럼 방향 잃은 현대인들의 모습과 김정은 위원장 앞에서 행복에 겨워 눈물 흘리는 북한의 아이들의 모습에서 공통점 하나를 발견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여전히 처음마음을 간직하고 있는가?
나는 서른 살이 되던 해에 미국에서의 이민생활을 정리하고 홀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민 초기, 자살 충동을 느낄 정도로 혼미했던 내 인생에 예수님이 은혜로 개입해주셨다. 그리고 그 감격과 감사가 신학교 문을 두드리는 사명으로까지 연결되었다.
그 당시에 나는 조국으로 돌아가 입시에 허덕이며 참 행복이 뭔지 모르고 사는 우리나라 청소년들을 섬기는 사역자가 되겠다는 꿈과 더 나아가 장기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박수 치며 인정해주는 진정한 멋진 교회를 세워보겠노라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고는 숨 가쁘게 달려온 세월이 23년이다.
23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간혹 나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나는 왜 이민생활을 정리하고 여기에 와 있는가?”
그리고 연이어 이런 질문을 던진다.
“아직도 23년 전의 순수했던 ‘처음마음’이 내게 살아 있는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은 내 마음에 숨어 있는 불안감 때문이다.
그것은 요한계시록 2장 4절의 말씀,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라고 하신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향한 서슬 퍼런 주님의 책망이 오늘 나에게 던져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다. 그래서 나는 자주 이렇게 독백하며 묻는다.
“어떻게 하면 이민 보따리 두 개 싸들고 홀로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타던 그때의 ‘처음마음’을 회복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사랑 하나면 더 이상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고백하던 뜨거운 가슴을 회복할 수 있을까?”
믿는 자들에게 전해지는 복음
사실, 처음에 이 책을 기획한 것은 예수 믿지 않는 분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기초적인 복음과 주님의 십자가 정신에 대해서 다루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복음의 기초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이 이미 예수 믿고 있는 기존 신자들에게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마서 1장 1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롬 1:15
지금 바울은 애타게 복음 전하기를 원하는 대상이 있는데, 그 대상에 대해 8절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롬 1:8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로는, 복음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것인데, 놀랍게도 바울은 이미 예수 믿고 있는 성도들, 아니 믿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 믿음이 성숙해서 온 세상에 소문이 펴져 있는 사람들을 향해 복음을 전하고 싶어 한다. 바울이 얼마나 간절히 이미 성숙한 믿음을 가지고 있던 로마 성도들에게 복음 전하기를 갈망했는지, 로마서 1장 13절에서 그는 이런 고백을 던진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롬 1:13
이 대목에서 나는, 믿는 우리의 신앙의 연조가 깊어질수록, 그리고 영적으로 충만하면 할수록 더욱 복음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지난 시간을 반성한다. 우리는, 사실은 자신을 억압하는 독재자 김정은 위원장 앞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북한의 아이들이나, 혹은 여전히 돈을 많이 벌면 벌수록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우리가 발견한 ‘진정한 행복의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줘야 할 책임이 있는 자들이다.
중요한 것은,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처음마음’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 그때 내 환경과 상황을 초월하여 누렸던 진정한 행복감을 되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처음마음’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 복음의 처음 자리로 되돌아가야 한다. 내가 ‘진정한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데 어떻게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 책이 한국 교회 성도들에게 로마서 1장에서의 바울의 심정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먼저 우리 가슴에 복음의 열정이 회복되기 원한다. 하나님을 처음 만났던 감격이 회복되기 원한다.
그리고 나는 예수님 믿지 않는 분들의 손에 이 책이 들려지기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음을 깨닫게 되기를, 세상에서 만날 수 없는 인생의 참된 보호자를 만나게 되기를, 그래서 그분을 향한 사랑의 처음마음을 갖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나를 찾아오셔서 내게 참 행복의 씨앗을 심어주신 그 주님과의 동행을 시작하게 되기를 원한다.
(하략)
이찬수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