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을 돌아보면, 곳곳에 이야기가 널려 있다. 책장에는 소설책이 꽂혀 있고, 마루에는 신문이 놓여 있다. 텔레비전을 켜면 각종 뉴스와 새로운 소식이 들려오고, 영화관에는 신작 영화가 변함없이 등장하고 있다. 요즘 사람들이 많이 보는 유튜브도 일종의 이야기이며, 세상의 많은 관심을 누군가의 시각으로 정리한 기록물이다. 소문은 어떠한가. 늘 얻어듣고 감탄하고 분노하는 주변 사람의 사연은, 결국 이야기로 만들어졌을 때 더 그럴듯하지 않던가.
---「프롤로그―이야기를 먹고 사는 이야기」중에서
우리는 어떠한 이야기이든 ‘나’의 이야기로만 수용할 수밖에 없다. 그 ‘나’만이 변하지 않는 ‘무엇’, 그러니까 자신으로서의 ‘나’ 안에 있어야 하는 그 ‘무엇’ 같은 진실에만 반응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이야기에 ‘나’가 존재할 수밖에 없고 그 이야기를 ‘나’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소박하게나마. 그래서 이 책은 세상의 ‘나’를 찾아 떠나는 모험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프롤로그―이야기를 먹고 사는 이야기」중에서
우리는 때로는 내 앞에 있는 상대가 과연 이전까지 내가 알던 사람일까를 의심할 정도로 심각한 변화를 인지하곤 한다. 이 사람이 내가 알던 친절했던 그 남자일까, 이 아이가 내가 알던 착했던 그녀일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생각하면 우리는 상대를 완전히 같은 상대로 대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면이 상대에게 있을 수 있다는 가정을 놓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는 그러한 변화에 깊은 충격을 받은 뒤라도 상대를 동일자로 믿기 위해서 노력한다.
---「3장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과연 같은 ‘나’일까?」중에서
인간은 기다리는 존재이다. 기다리는 것 외에는 좀처럼 다른 일을 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물론 기다리는 행위를 거부하고 직접 만나러 가거나, 불가능을 역전시키거나, 새로운 도전을 일삼을 수도 있겠지만, 궁극에는 기다림이 인간에게 주어진 조건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도리가 없어 보인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기다리는 존재라고 대답할 수 있을 듯하다.
---「4장 ‘나’는 기다린다. 고로, 인간일 수 있다」중에서
주목할 만한 영화, 소설, 연극 등은 계속해서 “‘내’가 누구인가”를 자문하기 마련인데, 그 대답이 여의치 못하면 질문을 방향을 바꾸어서 “과거의 ‘나’는 무엇인가?” 혹은 “‘내’가 아닌 상태였을 때의 ‘우리’는 과연 지금의 ‘나’와 무엇이 다른가?” 등으로 질문의 형태를 변화시키곤 한다. 이러한 변화는 ‘나’를 찾는 모험에서 등장할 수밖에 없는 질문이고 대답이다.
---「5장 ‘나’는 변신한다. 고로, 살아갈 수 있다」중에서
우리는 알고 있다. 과거의 ‘나’가 현재의 ‘나’와 어떠한 방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과거가 없다면 현재도 없을 수 있다는 두려움은 비단 어느 한 사람만의 걱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동시에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는 깨달음도 지니고 있다. 과거의 ‘나’가 지나치게 현재의 ‘나’를 제약할 경우, 우리는 과거에서 오는 신호로 인해 현재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다.
---「5장 ‘나’는 변신한다. 고로, 살아갈 수 있다」중에서
치히로가 이름의 상당 부분을 잃고 센이 되어야 하거나 하쿠가 자신의 긴 본명을 잊고 유바바의 심부름꾼이 되어야 하는 사정도 이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잃은 것은 마법의 이름만은 아니었다. 또한, 이름을 잃는 것은 그들만도 아니었다. 이 순간에도 세상의 많은 이들이 이름을 잃고 있으며 그 순간에도 서로 다른 이름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센이 된 치히로나, 하수인이 된 하쿠는 마법 세상의 인물만이 아니다. 그들은 현실의 인물이며,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아이들은 그들이 처한 현실을 통해 현실이 어떠하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다. 적어도 그러한 현실을 마주했을 때, 더 이상 놀라지 않을 대응력도 갖출 수 있다.
---「7장 ‘나’의 이름을 찾아 반쪽세상을 헤매다」중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서는 아름답게 순화된 동화와 같은 인위적인 조작이 드물고, 인간과 세상에 대해 대책 없이 미화된 표현을 좀처럼 찾기 어렵다. 이 점은 그의 작품이 아이들에게 걸맞은 이유를 시사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세상을 선과 악, 혹은 나의 편과 남의 편으로 간단하게 재단하지 않고 있으며, 복잡한 세상살이의 간난신고를 일부러 삭제하지도 않았다.
---「7장 ‘나’의 이름을 찾아 반쪽세상을 헤매다」중에서
매트릭스가 시스템이고 운영 원리라고 하면, 인간의 역사와 함께 존재하는 모든 사회가 이 매트릭스에 해당한다. 매트릭스는 그러한 측면에서 부재하는 것도, 새로운 것도 아니다. 인간의 의식을 속박하고 있다는 논리도, 사회가 부여하는 규율과 관습 혹은 법과 상식을 통해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은 매트릭스라는 수많은 시스템을 건설해야 했고, 그 안에서 살아야 했으며, 결과적으로 그 시스템에 저항하거나 그 시스템을 변혁하려는 노력을 일관되게 해왔다.
---「9장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 존재해왔다」중에서
「메멘토」중에서는 그러한 레너드의 필사적인 기억법이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기억을 되찾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을 왜곡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레너드는 기억을 가지지 않은 인물임에도, 자신의 기억을 왜곡해야만 자신이 존재할 수 있다는 본능에 대한 기억은 잊지 않은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11장 만들어진 기억이 현재의 ‘나’를 만든다」중에서
「라쇼몽」중에서은 기억이 얼마나 작위적인지, 그리고 그 기억을 바탕으로 한 발언이 개인마다 얼마나 큰 격차를 보이는지, 결과적으로 이러한 불완전한 기억과 발언으로 생겨난 생각이 세상(진실이 있다면)의 모습을 얼마나 왜곡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자 한 작품이다. 개인이 자기 통제력을 갖고 진실을 말하려 해도, 진실은 진실일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니 대부분의 인간이 진실에 접근하려는 노력보다는 자신의 입장에 맞춘 발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애초부터 진실을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거나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12장 세상은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진 ‘나’로 가득하다」중에서
세상에 널려 있는 나는 누구나, ‘낀’ 존재가 될 수 있다. 두 개의 입장 사이에서 선택할 수 없고 한쪽으로 편입될 수 없는 균형을 강요받을 때, 그 문제적 ‘나’는 낀 자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는 그럴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데, 영화는, 그것도 좋은 영화는 그 가능성을 실현하여 보여준다. 백인이 아메리카 원주민을 점령하거나, 인간이 외계의 원시 종족을 공격하거나, 인간이 동물을 척살하려 하는 설정은 이러한 낀 존재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좋은 영화는 우리에게 그 낀 존재에 대한 균형 잡힌 의식을 보여준다.
---「16장 ‘나’와 ‘너’ 사이에는 누가 있을까」중에서
데이미언은 그 와중에 친족에 의해 처형되었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처형의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 혹은 자신의 신념과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 어제의 동지이자 핏줄의 인연을 이은 자들을 죽여야 했던 역사는 비단 아일랜드만의 것은 아니었다. 한국의 사례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각별하게 주목되었다. 가령 오태석의 「자전거」중에서는 친척과 이웃을 죽인 당숙의 참회를 배면에 깔고 있다. 그는 이념의 대립 속에서 자신이 살기 위하여, 자신의 형과도 같았던 친족을 가두고 불을 질러 살해해야 했다.
---「17장 ‘나’와 ‘너’가 뭉쳐 ‘우리’가 되었지만, ‘우리’가 갈라지자 ‘나’와 ‘적’만 남았다」중에서
데이미언이 처벌된 세상도, 지미가 추방된 세상도, 그러한 데이미언과 지미가 다시 돌아온 세상도 이러한 이치는 다르지 않았다. ‘나’와 ‘너’가 만나 ‘우리’가 되고, 그 ‘우리’가 더 큰 우리가 되었지만, 궁극에는 그 ‘우리’가 나누어지면서 ‘나’와 ‘적’만 남았다. 처음부터 ‘나’와 ‘나’의 시작이었는데도, 언제부터인지 ‘나’는 ‘내’가 아닌 ‘적’과 동거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 가운데 ‘적’은 누구였을까. 아니 ‘나’는 누구여야 하는가. 혹 그렇게 생겨난 ‘적’이 ‘나’는 아니었을까.
---「17장 ‘나’와 ‘너’가 뭉쳐 ‘우리’가 되었지만, ‘우리’가 갈라지자 ‘나’와 ‘적’만 남았다」중에서
「5일의 마중」중에서은 문화대혁명이라는 가혹한 수난에서 잃어버린 것이 비단 가족과 지식인의 자리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세상의 중심이 되어야 할 ‘나’였음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그렇다면 역이 아닌 어떤 곳이라도, 돌아오지 않는 ‘나’를 찾아 나설 수 있을 것이다. 아내의 옆에 서서 자신의 이름을 든 사람은 아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남편이기도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잃어버린 ‘나’를 찾아 나선 본래의 자아일 수도 있다. 언제나 그렇지만, ‘나’는 맨 마지막이 되어서야, 잃어버린 것 속에 ‘내’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는 듯하다. 아마, 그 정체를 너무 찾기가 어려워서일 것이다.
---「18장 돌아오지 않는 ‘나’를 ‘너’와 함께 마중 가다」중에서
「버킷리스트」중에서가 던져주고 있는 내용과 의미는, 절박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온전히 보이는 것들이 아닐 수 있다. 쉽게 말해서 죽음 앞에 서 있지 않은 이들에게는 공상이나 허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현실에서 멀리 놓여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현실에서의 부정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기를 권유한다. 우리 주변에는 분명 죽음이 있다고 말하고, 그 죽음 앞에서 어떻게 ‘나’를 찾아야 하는지를 종용하면서 말이다. 이 점은 동시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죽음 앞에 서야 하는 ‘나’에 대한 점검이자 물음이기도 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즐거움을 얻었는가라는, 본연적 물음 말이다.
---「19장 ‘나’에게 가장 나중 오는 것은…」중에서
모든 이야기는, 결국 ‘나’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요체는 그 ‘나’를 해명하고, 세상을 이루는 ‘나’를 확인하는 작업과 다르지 않다. 그 ‘나’가 다종다양한 얼굴과 위장으로 서사체 내에 철저하게 숨어 있다고 해도, 서사가 발화를 시도하는 순간 그 정체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에필로그―이야기의 중심과, 그 중심으로서의 나」중에서
‘나’에 대한, 나의 접근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는 우리 안의 ‘내’가 반드시 고정된 실체가 아님을 알고 있다.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는 우리 안의 ‘내’가 하나라거나 변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버린 지 오래가 아닐까. 이야기는 결국 그러한 ‘나’의 궤적이며, 그 궤적을 집요하게 쫓아 확인하는 작업은 아니었을까. 세상의 모든 ‘나’를 찾아, 많은 이야기를 뒤지는 것도, 그래서 어쩌면 문학과 예술에서 말하는 모험이 아닐까 싶다.
---「에필로그―이야기의 중심과, 그 중심으로서의 나」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