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륙 후, 14,000 피트를 지나며 “딩!” 하는 소리와 함께 안전벨트 사인이 깜박인다. 일어나 일하라는 신호다. L1에 있는 사무장이 건너편에 있는 내게 손짓한다. 조금만 더 앉아 있어. Slowly.
SP가 메뉴 카드를 나눠주고 갤리로 올 때쯤 일어난다. 메인 코스가 들어있는 오븐을 작동시킨다. 건조오븐이라 MED 20분에 맞춘다. 빵은 12분. 칵테일 트롤리 위로 위스키, 진, 보드카 등의 알코올과 주스, 탄산음료, 믹서-소다워터나 토닉워터 같은- 등이 와인 글래스, 샴페인 플루트, 텀블러들과 함께 준비된다. 미리 데운 아몬드를 SUT에 잘 배열한 후 트롤리에 올려놓는다. 승객 이름 리스트를 앞에 붙이고, Are you ready? 하고 앞서가는 SP와 함께 캐빈으로 나가는 J1과 J2. 곧 J1은 돌아온다. 한 트롤리에 세 명이 매달려 있는 건 안 그래도 좀 우습지.
--- pp.50-51
수많은 항목으로 분류되는 공항 이용료 가운데 착륙료라는 게 있다. 항공기가 활주로에 닿는 그 짧은 순간에 지불하게 되는 비용이다. 100톤이나 되는 연료를 다 소비하고도 B747의 경우, 300톤이나 된다. 아무리 부드럽게 안착한다하더라도 그 무게의 동체가 활주로에 닿는 순간 활주로 면은 패이고 깎이게 마련이다. 그래서 무거운 점보일수록 착륙료가 비싸다. 사람들의 문제도 마찬가지 아닐까? 결과가 큰 문제일수록 수습하기에 벅찬 법이다. 작은 실수로 멀리 돌아가야 하는 두 사람. 결국 힘들게 값을 치러 안타깝지만 오늘,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다.
--- p.76
아시아 각국에 한류가 시작되기 전에도 수많은 연예인들과 만났다. 93년 초, 퍼스트 클래스에 탑승한 강수연 씨의 모습은 십사 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선명하다. 당시 주니어였던 나는 이코노미 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SP의 배려(?)로 일등석까지 가서 그녀의 잠든 모습을 넋 나간 듯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그녀는 예뻤다. 너무 예뻤다. 다른 나라 크루들도 잠든 그녀의 얼굴이 조각 같다고 난리 법석을 떨었을 정도로. 그 비행엔 미스 필리핀 출신의 크루도 있었지만 강수연 씨의 얼굴을 보며 감탄을 했었다.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대만과 홍콩에서도 한류 열풍이 거세지면서 소위 셀러브리티(Celebrity)라고 하는 스타들과의 랑데부가 잦다. 하늘 위에서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체류할 때 호텔이나 유명 관광지에서 마주치는 경우도 있다. 정치, 사회, 종교계의 유명인들도 마찬가지다. 외계인처럼 아름답고 멋있는 그들을 서브하는 것은 일탈과도 같은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
그들을 대할 때의 감정이 일반 승객들과 똑같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인생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그들이 내 앞에 앉아 있는데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느냐마는 예전처럼 황홀경에 빠지지는 않는다. 십여 년 전에 주윤발에게 사인을 너무 많이 받다가 보디가드에게 싫은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주윤발을 제외하곤 사인을 받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 pp.108~109
창밖으로 깜깜한 땅 위를 달리는 고속도로가 눈에 들어온다. 달리는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저 많은 차들이 공항으로 오는가 보다. 그리운 사람을 마중 나오는 길, 얼마나 설렐까? 출장에서 오는 아빠를, 여행길에서 돌아오는 친구를, 방학을 맞아 잠시 귀국하는 자식을 반기러 오는 사람들이 하얀 불빛으로 달리고 있다.
지금 저들 중 누군가도 하강하는 우리를 올려다보고 있지 않을까? 양쪽 날개와 꼬리에 불빛을 단 하늘 새처럼 둥지를 향해 내려앉는 우리를 보며 상상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저 비행기에 보고 싶은 아빠가, 친구가, 자식이 타고 있지는 않을까? 날개 끝의 적색 등, 녹색 등 그리고 항공기 동체 끝의 백색 등은 땅 위에서 올려다보면 빨간 별, 초록 별 그리고 하얀 별 같을 테다.
--- pp.179~180
쿵! 이이잉!
겨우 잠이든지 5분이나 됐을까? 순간 몸이 붕, 하고 떠오르다 안전벨트에 걸려 떨어진다. 10미터 높이의 낭떠러지에서 낙하하는 기분으로. 안전벨트를 조이고 누워 천만 다행이다. 잠이 깬 여덟 명 모두 숨죽이고 안전벨트를 바짝 조인다.
“Cabin crew, be seated right away.”
기장의 다급한 지시 후로도 기체가 무섭게 흔들린다. 클리어 에어 터뷸런스(Clear air turbulence; 청천 난기류). 옛날에는 에어 포켓(Air pocket)이라고 부르던 난기류다. 사력을 다하는 엔진 소리가 둔탁한 두려움이 되어 가슴을 쿵쿵 친다. 손톱자국이 진하게 파일 정도로 안전벨트를 부여잡는다.
캐빈은 지금 어떨까, 라는 생각은 한참 후에야 떠오른다. 청정 고도로 순항하다가 마른하늘의 날벼락을 맞았을 캐빈의 동료들도 기체의 흔들림이 완전히 멎은 후에야 생각난다. 뇌신경을 장악하는 것은 아이들이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집에 두고 온, 지금쯤 깊은 잠에 들어있을 세 아이들의 얼굴이 파노라마에 실려 지나간다. 사랑해, 얘들아. 아주 많이.
--- p.232
“아니, 한두 가지가 아니라니까. 비행기 탈 때부터 자리를 묻는 데 쏼라 쏼라, 하면서 영어 못한다고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땅콩 좀 더 달라는 데, 그게 그렇게 못마땅하냐고요. 그리고 제일 기분 나쁜 건 기껏 밥 달라고 했더니 국수 밖에 없다면서 미안하다고도 안하고. 밀가루 음식 못 먹는다는 데 굳이 국수를 먹으라고 하고. 도저히 입맛이 안 맞아 빵 하나 더 달라는 데 갖다 주지도 않고, 쟤네들이 날 무시하잖아. 지들이 뭐 그리 잘났다고.”
밀가루 음식을 못 드신다는 분이 빵을 더 안 줘서 화가 나셨다는 것도 들어드려야 한다.
“아, 그러셨군요. 저희 크루들이 섭섭하게 해 드렸군요.”
이제 본격적인 신세 한탄이 시작될 거다. 분명히.
--- p.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