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한 인간에게서 생기를 빨아들여 생명을 이어 가는 흡혈귀인 란은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인간 세이와 운명적 인연을 맺는다. 그러나 장마가 그친 뒤 폭발적으로 전파된 감염병은 조용히 살아가던 흡혈귀의 삶마저 바꾸고, 그들 대다수는 이제 ‘떠나야 할 때’임을 직감한다.
「나무왕관」
자매신 그누와 느위가 각기 하늘과 땅을 관장하는 세계. 동물 정령들과 함께 순례의 길을 걸어온 나그네가 당도한 곳은 한동안 남자아이가 태어나지 않은 마을이었다. 어리석은 행태가 이어지던 마을의 참상을 목격한 나그네는 오랫동안 짊어진 사명을 수행한다.
「우주 시대는 미신을 사랑한다」
엔지니어인 젠은 일자리를 찾아 도착한 행성의 공항 직원인 호림에게 첫눈에 반한다. 연인으로 발전한 두 사람은 십 년의 세월이 흐른 끝에 함께 지구로 귀향하기로 하고 우주선에 탑승하지만, 팍팍한 항해 생활 중 서로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만 간다.
「청백색 점」
어린 시절부터 나는 어느 차원으로 이어지는지 모르는 기이한 검은 점을 목격하고는 했다. 주변 사람들의 우려 때문에 외면했더니 보이지 않게 된 그 점은 시간이 흘러 실의에 빠져 있는 내 앞에 다시 나타난다.
「만세, 엘리자베스」
어느 날 아침, 직장인 정주은은 자신이 로봇청소기 엘리자베스와 몸이 바뀌었음을 깨닫는다. 청소를 시작하겠다고 선언하며 마구 달리는 육체를 황망한 마음으로 뒤쫓는 주은은 과연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용의 만화경」
대학원생 구은진의 연구실에 사자탈을 쓴 이상한 사내가 찾아온다. 백 년 전 초대 총장이 예외적으로 받아들인 탓에, 여전히 학적부에 올라 있던 진짜 용이 다시 수업에 나오게 된 것이다. 졸지에 용의 뒤치다꺼리를 하게 된 은진의 대학원 생활은 갈수록 꼬여만 간다.
「M과 숨」
사춘기 시절부터 유독 사건사고가 많았던 친구 M이 냉동수면에 들어가는 날, 늘 그 곁을 지켰던 은우는 명랑한 목소리로 이제 전화를 없애겠다고 선언한다. 예정보다 훌쩍 지나 버린 미래, 아무도 없는 세계에서 홀로 깨어난 M은 버릇처럼 은우를 찾아 헤맨다.
「소모품 마법사」
용은 사라졌지만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 마법 소질이 있는 아이들은 왕명에 의해 의무적으로 교육 기관에 보내지지만, 그 대부분은 전쟁의 화살받이 신세가 되는 하급 마법사가 될 운명이다. 여자들로만 구성된 하급 마법사 부대 소속의 에롤은 동료들과 함께 갑작스럽게 도주한 영주의 자제를 뒤쫓는 임무를 맡는다.
「나와 밍들의 세계」
아이들에게 괴롭힘 받고 죽어 가던 고양이인 내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인간의 몸을 하고 있었다. 죽어 가는 생명체와 살아 있는 생명체를 연결해 주는 기계로 자신과 이어져 있다는 여자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나는, 그 여자를 ‘밍’이라 부르게 된다. 그리고 나는 곧 ‘밍’의 일상이 위협받고 있음을 알게 되는데.
「수직」
가상공간에서 벌어진 파괴적인 해프닝, 그리고 연인과의 이별. 어쩌면 세상만사란, 무한한 난수에서 선택된 우연이 해체되어 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