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째 성업 중인,
그 묘한 허기가 떠오를 때마다 가는
밥집이 내 일터 가까운 곳에 있다
‘허기 충전’이란 상호를 내건
저 카운터의 흰머리 사낸 알고 있다는 걸까
한 끼의 식사 같은 거로는
원기가 충전되지 않는다는 걸
아니 충전된 허기가 더 검게 빛난다는 걸
밤새 달빛이 어루만지다 간 알 같은
부화를 기다리는
둥근 지붕의 저 식당에는
아닌 게 아니라
펄럭이던 검정 비닐에 구멍 뚫어
마늘을 심던 벌건 얼굴들의 담배 연기와
인근 공사장 인부들 발꼬랑내 나는 군화와
막걸릴 마시다 시비가 붙어
막 씩씩거리는 짧은 머리의 롱 패딩들
허기의 사촌쯤인 불만과
불만의 양아들뻘인 분노와 상처들이
연탄난로 위 주전자가 흘린 물방울처럼
따그르르, 츠잇츠잇 굴러다닌다
삶에 대한 계획 같은 건 아예 없는,
성실한 것이 아름답다고만 믿지 않는 눈빛의,
부시지 않은 빛 두르고 있는,
음지식물 같은
저들은
먹을수록 충전되는 단단한 허기
맷집처럼 키우러 집요하게
소슬한 저녁들을 찾아오는 게 틀림없다
--- 「허기 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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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달 전 명절 끝날 산책길
인적 뜸한 고향 신작로를 지나다 들었네
점잖지 못하게 왜 그랬어?
오빠란 놈이 동생을 그렇게 하면 어째?
아침 공기 잔잔히 물들이는 어떤 중년의 음성
그 오빤 보이지 않고 하,
누렁이 한 마리가 고갤 숙여
그 말 고분고분 듣고 있는 곁엔
누운 암탉 한 마리
(아마 옛 버릇을 참지 못하고
유순하던 개가 닭을 물었던 모양)
머릿수건을 쓴
그의 아내인 듯한 환한 여인은 또
왜 암말도 안 하고 아궁이에 장작불만 지피고 있었는지 몰라
가축 두어 마리, 가금 대여섯
키 낮은 채송화 분꽃, 해바라기와 사는 필부인
그 사내 부부의 울타리 너머
꿈결같이 들은 그날의 음성과
실수 때문에
가책받은 얼굴로 고갤 숙이던
그 착한 개의 표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내가 다 죄인인 듯 마음이 저려 온다네
알아듣기나 했으려나 그 말?
메아리 소리 곱게 울리던 그날 아침
아 참, 내가 진정 못 본 건 또 무얼까?
--- 「개의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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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예보가 어긋났나,
피서 온 가족은 숫제 물의 지배 아래 들었다
폭풍우의 멱살잡이에 제 성질 못 이긴 창이 덜컹거린다
쿵쿵 우둥퉁 쳐들어오는 물기둥은
햇살에 수런대는 나뭇잎의 기척이며
지저귀는 새소릴 작살내고
배음으로 흐르는 시냇물의 아예 감옥으로 처넣는다
손을 넣어 만질 수도
벌컥 삼킬 수도 없는
저 돌멩이가 다 된 물은 무엇 때문에
혁명처럼,
쿠데타처럼 깡패처럼
세상을 온통 찢을 듯한 훈계로
도회의 더위와 피로 피해 찾아든 식솔들에게
막무가내 가르치려 드는가?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오도도 떠는 몰골로 들으라고만 하는가?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습한 이불 끌어 덮어도
꿈속 몸을 불리는 불길한 새끼 원숭이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밤
딱딱한 공기를 더 딱딱하게
음울한 것을 더 음울하게
우리 간까지 슬슬 보는 손아귀에 가슴을 잡힌
세찬 급류의 며칠
돌로 핀 험상궂은 물의 말씀, 그와 맞닥뜨리기 전엔
생이 그리 놀라운 것도 두려운 것도 알지 못했다
--- 「물의 설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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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이만큼
흰 종이가 숨긴 저잣거리를, 가파른 계곡을
잘 파헤치는 이는 드물리
고요와 소음을 가로질러 가는 저이의 발자국이
발자국의 열정이
미소 짓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 표정보다
광산이 거느린 분화구보다
더 뜨거우리
백지의 첩첩계곡 들어가 답답한 것들을
부둥켜안고,
오오래 심해에 갈앉은
겹겹으로 둘러싸인 숨결에 주파수를 맞추는
저 입술이 지나간 백지엔 더 이상 낱장의 평면은 없으리
도약을 위해 고개를 박은 말꽃이 컹컹, 혹은 화들짝
피어날 때까지
저 곡괭이는 죽음마저 따뜻한 체온,
사랑을 캐내곤 했으니
어느새 시큼해진 발자국
뒤꿈치에선 마악,
몇 마리 나비
팔랑체로 넘실거리는 글줄을 피워 올리리니
저이는 가파른 거죽을 갈아엎으면서도 히힝,
눈물이 고인
푸른 힘줄의 울음을 운다
--- 「만년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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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 하오 산책길
오늘 내게 놀라운 사태事態는
연 이파리 위
소리 물고 파닥이는 물방울을 보는 일
제 몸에 똬릴 트는
하늘도 해도 털어 내며
굴러 내리는 맨얼굴의 말 알아듣는 일
(……)
머물던 세상, 손 탈탈 털고
한 방울 바다의
중심으로 뛰어드는 일
밀어라 밀어라 바람아
전율하는 이 가슴을
수평선을 기울였다 펴는
세상 가장 아찔한 상쾌 속으로!
--- 「물방울 속으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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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예기치 않은 한 손님이 찾아왔다
내가 쓴 문장 속 식구들이 서로의 목소릴 내며
문 닫고
등 기대어 돌아앉아 있을 때
그는 외계에서 온 것도
문을 따고 들어온 도둑도 아니었는데도
식구들은 몰랐다
공기인 듯
물줄기인 듯
식구들 틈으로 스며들어
모를 소리를 풀어내고 뚫어내고 녹여내는 그의 발걸음을
그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은 더더욱
거짓말같이 한방 가득
맑은 기운이 퍼졌다
--- 「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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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이 넘은 설산의 휴양림
깊은 골 따라 랜턴을 비추다
씨앗처럼 심긴 눈동잘 기어이 캐내고야 만다
신음처럼 켜져
무겁게 숨소리마저 보내는
내 몸에도 흐르는 저 살별들을 나는
밤의 창이라 부르고 싶었다
(……)
날갯죽지나 뱃가죽 아래 두근거리는
여린 뼈와 가슴이 내는 저 흐르는 빛의 발광發光은
소심하거나 격렬한 영혼에 더 가깝다
어둠의 옆구리에 손 질러 볼 필요도 없이
못 보던 빛줄기가 그 영혼을 간섭할 때
머루알처럼 또렷이 켜지는 구멍은
때론 표정 감추기 위해 초조를 절반쯤 깨물고 웅크린
창窓이다가도
피로가 더해지면 찌를 태세로 불붙는 창槍!
--- 「그 눈들을 밤의 창이라 부르겠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