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정치와 경제의 흐름을 체감하는 일이기도 하다.『유럽의 세기말』이라는 책에는 “당대의 천재를 보면 그 시대가 보인다”라는 구절이 있다. 즉 우리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며 18세기를 경험할 수 있고 나폴레옹, 베토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19세기를 느낄 수 있다.
한 예로, 경제의 주요 거점이 이탈리아,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으로 이동하면서 음악가들의 활동 무대가 바뀐 것을 들 수 있다. 독일의 헨델과 오스트리아의 하이든은 시민혁명이 일어난 영국으로 건너가 막대한 부를 쌓았다. 마치 급성장 중인 경제 대국의 축구팀에서 전통 강호국의 톱 플레이어를 자국 리그에 스카우트하는 것과 같다. 즉, 일류 음악가들의 활동 무대를 알면 당대의 경제 중심지를 알 수 있다.
--- p.6
프랑스혁명에 앞서 명예혁명이 일어난 영국에서는 헨델이 유럽에서 유행 중이던 이탈리아 오페라를 일반 시민에게 정착시키려 했으나 시민들이 낯선 이탈리아어를 지루해한 탓에 실패로 끝났다(결국 헨델은 영어로 쓴 오라토리오를 제작하는 데 열중한다). 한편 독일에서 오랫동안 카펠마이스터로 지내던 하이든은 만년에 자신의 교향곡이 런던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자 “내 언어는 전 세계가 이해한다”라고 말했다. 말 그대로 음악이 국경을 초월한 것이다.
이처럼 음악을 듣는 계층이 귀족에서 시민으로 옮겨가자 기악과 오페라의 지위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세기에는 마침내 기악이 오페라에 승리를 거둔다. ‘악기 버전의 오페라’라고 표현될 만큼 기악이 맹위를 떨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기악의 수준을 한층 끌어 올리며 교향곡을 절대적 지위에 올려놓은 이는 바로 베토벤이었다.
--- p.17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중 제3번은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영화[다이하드](존 맥티어넌 감독, 1988년)의 파티 장면에도 삽입되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파티장에 테러리스트가 침입한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지만 음악에 귀기울이다 보면 그들이 곧 위험에 처한다는 사실이 상상되지 않는다. 그만큼 즐겁고 신나는 곡이다. 또한 제5번에서는 첼로를 처음으로 독주 악기로 사용했다. 특히 제1악장은 아침에 듣기 좋은 곡이므로 커피 향 가득한 아침 식사 시간에 꼭 감상해보았으면 한다.
바흐의 전성기였던 30대 시절의 작품[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은 음악실에 걸린 그의 근엄하고 무서운 초상화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랑스럽고 즐거운 곡이다. 아무쪼록 여러분도 주옥같은 작품으로 가득한 바흐의 보석 상자를 열어보기 바란다. 그의 음악이 당신을 기품 있는 보석처럼 만들어줄 것이다.
--- p.46
헨델의 관현악 곡집으로 알려진[수상 음악]은 국왕의 뱃놀이를 위해 작곡된 작품이다. 당시에는 국왕이 뱃놀이를 할 때 수많은 오케스트라 연주자가 배에 올라 끊임없이 연주하는 전대미문의 대형 행사가 펼쳐졌다. 요즘이라면 오디오로 틀었겠지만 당시에는 전기가 없었기 때문에 행사에 맞춰 생음악을 연주한 것이다. 헨델은 영국 왕 조지 1세를 위해 다수의 ‘수상 음악’을 만들었다.
이 곡은 어떤 상황에서 연주됐을까? 기록에 따르면 “1717년 7월 17일 오후 8시경, 국왕 일행은 런던 중심부에 있는 화이트홀 선착장에서 승선하여 만조를 타고 템스강 상류의 첼시로 향했으며 약 3시간 후인 11시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일단 상륙하여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다가 다음 날 새벽 2시에 다시 승선하여 썰물을 타고 도심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음악은 배가 떠나서 돌아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행사인가! 악단은 틀림없이 녹초가 되었을 것이다.
--- p.54
하이든의 곡은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는 음악’처럼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하이든은 인간이 보유한 최고의 능력은 이성이라고 믿었다. 하이든의 음악은 따뜻하고, 좋은 의미의 거리감이 있으며 힘들 때 위로가 된다. 최근 대형 연주 홀은 주로 웅장한 음향을 갖춘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공연하기 때문에 하이든의 작품을 접할 기회가 드문데 이번에 이 책을 집필하면서 다시금 그의 작품들을 들어보며 필자도 팬이 되었다. 에스테르하지 공이 왜 그토록 그를 붙잡아두었는지 한편으로는 이해가 됐다.
하이든은 궁정 악단의 단원들을 관리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인망도 두터운 인물이었다. 그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유일한 사람은 부인일 것이다(그의 부인은 ‘악처’로 유명하다).
--- p.69-70
레오폴트는 어린 아들의 비범한 재능을 일찍이 알아보았고 모차르트야말로 신이 내린 기적의 선물이며 그런 천재를 제대로 키워내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굳게 믿었다. 그래서 장차 고용주가 될 제후 앞에서의 연주도 대비할 겸 잘츠부르크를 떠나 연주 여행에 나서기로 했다. 그 계획은 실로 가혹했다. 당시 모차르트는 고작 6세였고 그 여행은 23세가 되어서야 끝났다. 35년이라는 짧은 생애의 많은 시간을 여행에 소모한 것이다. 지금처럼 비행기나 기차가 있던 시절이 아니라서 모차르트는 육체적으로 매우 힘들어했다. 자가용 마차, 우편마차, 역마차, 시장선(市場船), 운하선 따위를 타고 뮌헨, 빈, 만하임, 파리, 런던 등을 순회한 것이다.
--- p.71-72
어느 날 베토벤을 방문한 누군가가 ‘행동이란, 당신에게는 작곡하는 일 아닙니까?’라는 글을 필담장에 남긴다. 그 일을 계기로 베토벤은 음악계의 나폴레옹이 되어 진리를 위해 싸우겠노라 표명한다. 그는 자유 쟁취 의지를 담은 메시지가 강한 곡을 많이 썼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아내가 남긴 일기(1880년 7월 14일)에는 베토벤을 숭배한 바그너가[운명]을 듣고 “마치 베토벤이 음악가로서의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군중 앞의 연설가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라고 했다는 구절이 있다.
--- p.87-88
파리 시절의 쇼팽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남장 여인으로 유명한 작가 조르주 상드 (1804~1876년)와의 만남일 것이다. 그녀는 섬세한 성격의 쇼팽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쇼팽은 1843년 아버지 니콜라의 부고를 전해 듣는다. 그가 걱정된 상드는 바르샤바에 있던 누나 루드비카를 불러 자신의 고향 노앙에서 한 달간 같이 지내기로 한다. 14년 만에 누나를 보게 된 쇼팽은 뛸 듯이 기뻐하며 피아노 소나타 제3번(1844년) 작곡에 착수한다. 이듬해에 완성된 이 소나타는 쇼팽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또한 같은 해에 완성된[뱃노래]는 이 소나타를 능가하며 창작의 정점을 찍는다.
--- p.126-127
차이콥스키 하면 3대 발레[백조의 호수],[잠자는 숲속의 미녀](1888~1889년),[호두까기 인형](1891~1892년)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러시아 현지에서 가장 유명한 클래식 음악은 그의 첫 발레 음악인[백조의 호수]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곡은 구 소련 시절부터 정부 주요 인사가 사망할 때마다 텔레비전에 나왔다고 한다. 정부는 권력 투쟁 등을 염려하여 사망 소식을 뉴스로 내보내는 대신[백조의 호수]를 틀었다는 것이다. 1991년 8월 구 소련의 보수파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도 온종일[백조의 호수]가 흘러나와 사람들은 ‘뭔가 또 일이 났군’ 하고 짐작했다고 한다.
--- p.150
라벨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곡은[볼레로]일 것이다. 볼레로는 3박자의 스페인 전통 춤이다. 이 곡은 스네어드럼이 두 마디짜리 리듬을 시종일관 강박으로 반복하며 그 횟수가 무려 169회에 달한다. 이 리듬 위에 같은 멜로디를 연주하는 악기가 하나, 둘, 셋 계속 추가되다가 마지막에는 다 같이 연주하고 갑자기 끝난다. [볼레로]는 사상 최대의 사망자를 낸 제1차 세계대전 종전 10년째 되던 해에 작곡되었다. 라벨은 그 전쟁에 참전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전쟁 중에 사랑하는 어머니와 동료를 잃고 한동안 실의에 빠져 지내다가 발레 무용수의 요청으로 53세에 이 곡을 작곡했다. 같은 춤이 끝없이 이어지다가 짧게 변형된 후 갑자기 끝난다. 베토벤처럼 영광을 쟁취하는 스타일의 마무리가 아니라 갑자기 막을 내린다. 사회가 불안에 휩싸인 시대에,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태를 표현한 곡처럼 느껴진다.
--- p.211
전 세계 오페라 팬을 사로잡은 베르디는 셰익스피어를 끔찍이 사랑했다. ‘매표소는 성공을 판단하는 가장 정확한 온도계’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베르디에게 극히 일반적인 관객부터 상류층, 전문가까지 두루 만족시켰던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가장 이상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베르디와 베토벤이 셰익스피어와 나란히 언급되는 이유는 전 계층이 수용할 수 있는 작품을 남겼기 때문이다. 베르디는 모두 28편(개작 포함)의 웅장한 오페라를 세상에 선보였다.
--- p.225